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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au(썰과 연재의 중간)/소설에 해당되는 글 9건
- 2017.02.27 | 다시 맞는 생일
- 2016.07.15 | 만수무강하시옵고...
- 2016.06.22 | 고딩 대리님
- 2016.06.13 | 생일축하드리옵니다
- 2016.06.10 | 과거의 나는 이게 왜 보고팠을까
- 2016.03.04 | 개시발본체새키
- 2016.02.24 | 찌질이와 욕쟁이
- 2016.02.19 | 어마무시하게 늦은 발렌타인데이...
- 2016.02.15 |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소설
글
다시 맞는 생일
일이 곱절은 늘어났다. 급작스러운 부서 통합때문에 결재라인도 엉망이고 너네 일, 우리 일 따질 겨를도 없이 오죽하면 부당하다 싶으면 칼같이 거절하는 윤대리도 들어오는 일들을 전부 받아 급한것부터 빠르게 처리하고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주말 출근은 아직도 불가피하고 토요일임에도 집에 도착하니 밤 9시를 넘겼다.
- 후우...피곤해.
현관에서 구두를 벗자마자 멀리 가지도 못하고 식탁옆 의자에 늘어지듯이 앉아 넥타이를 가슴팍까지 잡아내리다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담배를 꺼내려다 먼저 잡힌 폰을 꺼내 전원을 다시 켜자 무성의한 통신사 로고가 잠깐 나타나더니 잠금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비행기티켓과 여권 커버. 두 개 다 본인의 것은 아니었다.
- 벌써 두달짼가...
팀장의 제안을 거절하자 만만한 신입에게 출장지시가 떨어졌다. 가까운 아시아권도 아니고 멀리 영국으로 가버렸다. 서로 한가한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텐데도 그래도 꼬박꼬박 먼저 연락을 해왔다.
- 곧 생일인데...늦게 챙기는거 싫어하면서.
오늘은 한 번도 연락이 오지않아 작게 중얼거리기 무섭게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저 화면만 살짝 밀면 되는건데 오늘따라 귀찮고 피곤하다. 내려놓으려는 찰나 전화는 끊기고 금방 팝업창으로 메시지가 나타났다.
[피곤해요?]
- ...맘에 안 들어, 다 안다는 듯이 문자나 보내고.
전생때보다도 귀신 같이 사람 속을 꿰뚫어보았다. 그때와는 다르게 단순한 머릿속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감도 못 잡을 지경임에도 그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지금처럼 서로 떨어져 얼굴도 볼 수 없는 이 순간까지도 그는 지금 저가 지쳐있다는걸 알았다.
답장은 커녕 그대로 옷을 벗어던지며 씻으러 들어갔다. 머리부터 닿는 물에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목욕가운만 입고 침대에 눕기 무섭게 식탁에 그대로 놓아둔 폰이 다시 울렸다. 혼자만 다른 벨소리. 누군지 알면서도 오늘따라 받기 싫었다.
- 안 받아. 오늘은 안 받을거야.
답지않게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덮으며 몸을 몇 번 뒤척이다 끊어지는 벨소리에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잠결에 머리를 작게 움직이다보니 간만에 느껴지는 포근함에 본능적으로 품에 파고들었다. 머리위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대로 일정하게 등을 토닥여주는 소리도 들려왔다.
- 우리 무휼 많이 컸네, 주군 연락도 멋대로 안 받고.
- 어떻게 왔어.
- 무슨 질문이 그래요, 내 집인데 내가 못 들어와요?
공항에서 배웅을 해준 뒤 자신의 집이 아닌 애인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뒤론 매일 이 집으로 퇴근을 했고 아마 제 집은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거나 보름에 한 번 오는 청소해주러 오는 사람이 말끔하게 치워서 새 집 같아졌을 것이다.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들자 입술이 맞닿았다. 그대로 오랜만에 치아를 훑으며 그의 몸을 더듬어보니 근육보단 뼈가 더 잘 느껴져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 해외 체질이라며.
- 음...그것도 먹을 시간이 있을때 얘기죠. 우리쪽도 엄청 바쁜데가 잡아준 숙소는 또 회사랑 멀어서.
- 다시 찌워.
- 남말할 상황은 아닌거 같은데?
등허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는가 싶더니 옆구리를 간지럽히며 장난을 쳐 감고 있던 눈을 떠 노려보지만 얼굴엔 조금의 미안함도 없었다. 하여튼 장난은. 한숨을 쉬며 일어나려 몸을 일으키는데 묵직하게 자신을 붙잡는다.
- 일어날래.
- 다시 한 번 생각해봐요.
왜? 되묻다보니 스쳐가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입에선 욕이 터져나왔다. 그런 자신을 다독이는 따뜻한 손길에 괜히 더 울컥해져 제 애인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 안아줘.
- 이미 그러고 있어요.
- 가지마.
- ...
애인은 대답이 없었고 저또한 부질없는 부탁이였다는걸 안다.
전화 벨소리에 눈을 뜨자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몸을 일으켜앉으니 딱 자신이 누워있는만큼만 따뜻한 햇살이 너무나 포근할정도로 침대를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 아, 싫다.
허탈함에 중얼거리고 비척거리며 식탁으로 향하자 전화벨소리는 끊겼다. 누구에게 걸려온건가 싶어 통화기록을 다시 살피는중에 금방 전화가 울렸다. 어젯밤과는 다르게 오늘은 고민도 없이 화면을 넘겼다.
- 왜.
[어디야? 집에 없네?]
- 응, 애인 집이야.
[어? 그 사람 한국 왔어?]
식탁에 몸을 기대며 주위를 살폈다. 텅빈 집엔 기척이라곤 없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보이는 현관에도 값비싼 제 구두만 한 켤레 놓여있다.
- ...아니, 그냥 회사랑 가까워서 여기서 잤어.
[궁상맞긴. 미역국 넣어놓고 갈테니까 먹어.]
- 정말 쓸데없이 잘 챙긴단말이야.
[야, 나도 너 남친생기면 신경 안 써도 괜찮을 줄 알았거든? 얼마나 유능하길래 신입이 이렇게 길게 해외출장이냐?]
유능한걸까. 그러고보면 다시 태어나서도 머리 하난 좋은듯했다. 수능 만점으로 인터뷰도 하고 과외로 돈 벌고 수석졸업까지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아무리 애인이라지만 제 밑에 있으면서도 힘들다고 다른 부서로 옮겨달라는 소리없이 순순히 잘 따라오는걸보면 무능한 사람은 아녔다.
- 그러게...같이 갈걸.
[아무튼 미리 생일 축하한다, 임마. 나도 오늘부터 지방 좀 다녀와야해서.]
- 검도 사범도 해먹기 힘드네...알았어.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걸음을 옮겨 침대위로 폰을 던졌다. 살짝 걸터앉기만하다 결국 다시 드러누우며 이불을 잡아 끌어 몸을 덮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얼굴을 묻은 베개엔 더이상 애인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 ...싫다.
처음 며칠은 집에 들어올때마다 그의 냄새가 났다. 쓰던 향수와 바디워시, 샴푸. 전부 그대로 있고 똑같은 걸 사용하지만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는 애인의 냄새와는 달랐다. 아니, 어쩌면 원래 무슨 냄새가 나야하는건지도 이젠 기억이 안나는건지도 모르겠다.
손을 뻗어 폰을 찾아쥐곤 갤러리를 열어 옛날 사진들을 훑었다. 신입사원끼리 한옥마을근처로 엠티를 갔던 날 다같이 한복을 빌려 입고는 사진을 찍어 보낸적이 있었다. 아주 해맑게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도련님의 모습은 그 옛날의 무휼이 보았더라면 뭘 잘못 먹었느냐며 걱정했을정도로 어울리지않게 티없이 맑았다. 몇 장 더 넘기다보니 용량이 커서 맨날 버려야지,하면서도 못 버린 동영상이 남아있었다.
[무휼, 혼자 집 잘 지키고 있어?]
- 이봐, 도련님. 여기 더이상 네 냄새가 안 나...
[하하! 어색하다. 대리님, 여기 꽤 근사해요. 다음에 같이 올까요?]
- 전화 받을걸...도련님 지금 자고 있겠지?
[점심만 먹고 해산한데요, 난 차가 없어서 터미널까지 가고 또 서울가야하니까...도착하면 해떨어지겠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갈게요, 사랑해.]
- ...빨리 와.
멍하게 몇 번을 더 반복해서 동영상을 보다보니 뜨거워진 폰을 내려놓곤 고개를 돌렸다. 언제 돌아올까, 돌아오면 무슨 말부터 해줄까. 평소 잘 안 들던 생각이 휘몰아쳐서 어색할 지경이라 괜히 피곤한 탓이라 핑계를 대며 다시 자세를 고쳐잡고 눈을 감는다.
작년엔 엉망진창으로 보냈던 생일이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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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만수무강하시옵고...
*
몇 주전부터 시끄러웠던 학교는 아주 대놓고 사람이 넘쳐났다. 드라마자체도 파격적인 캐스팅때문에 유명했는데 그 촬영지가 자신들의 대학이라는것이 알려지자 학교에 잘 안오던 학생들도 얼굴이라도 한 번 볼 수 있지않을까하며 몰려들었고 덕분에 어딜 가더라도 사람이 그야말로 미어터졌다.
- 왜 드라마 촬영을 우리 대학에서 하는건데?
때로 몰려 이동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미간을 잔뜩 구기며 바라보다 균상이 빨대를 잘근잘근 깨물며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요한이 빨대를 그의 입에서 떨어뜨려놓으며 타이르듯 어깨를 토닥인다.
- 캠퍼스물 찍는다하면 우리 학교부터 온다잖아.
- 수업 안 가?
덥다며 뿌리치는 행동에 순순히 물러나면서도 제법 억울하단 표정을 지으며 균상과 눈을 마주하니 잠깐 눈을 마주하는가 싶다가도 입을 씰룩거리며 결국 피한다. 그의 행동에 졌다는듯 어깨를 으쓱이다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살핀다.
- 먼저 오라고한게 누군데? 안그래도 갈거다. 자취방 가있을거야?
- 그전에 도서관 가서 책 좀 빌리고.
- 집에서봐.
- 응.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대로 입술에 입을 맞춰오는 요한때문에 표정을 더욱 구겨보이지만 오히려 눈이 휘게 웃다 사라지는 모습에 기가 차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작게 웃음이 났다. 손을 흔들며 뒤로 달리는 모습에 저러다 넘어지겠다 싶어 빨리 손을 흔들어주자 정면을 보며 달려가는 요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갑자기 뒤에서 밀치는 학생들때문에 그들에게 휩쓸려 배우들이 촬영하는 현장까지 엉겁결에 도착하고 말았다.
- ...아, 짜증나.
- 선배!
배우의 비명소리와 둔탁한 충돌소리. 쓰러지는 또 다른 배우와 그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 수백개의 바늘이 갑자기 심장의 이곳저곳을 다급하게 찔러오는 느낌과 함께 눈 앞이 흐려져 고개를 제법 격하게 흔들어보지만 여전히 눈 앞에 보이는 피와 미친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에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 시발...후으, 진정해. 저건 가짜야...
- 선배! 정신차려봐, 선배!
재수없게 연기를 너무 잘하는 배우들이며 리얼리티를 살린 탓에 제법 피와 유사한 가짜 피에 급기야 코까지 시큰해지고 오한이 서리는 기분이 든다.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역시나 수업이 시작되었는지 거절해버린다. 문자라도 남겨야겠다싶어 힘겹게 폰을 두드리다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배우때문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시금 흥건한 피가 눈에 들어왔고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뒤로 몸이 기운다.
- 어! 형, 조심해요.
등을 단단히 받치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교복의 고등학생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어디 아파요?
- ...아냐, 그냥 좀...
감독은 불현듯 컷을 외치더니 다른 각도에서 촬영을 하겠다며 카메라를 돌렸다. 배우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여전히 가짜 피가 흐르는걸 내버려둔채 다음 촬영준비를 시작했다. 조금 경사진 길이라 천천히 내려오던 피는 그대로 균상의 신발끝에도 닿았다. 시발. 구역질이 날거같아 입을 틀어막는데 조금 전 자신을 받치던 고등학생놈이 갑자기 손목을 붙잡곤 사람들사이를 파고들며 자신을 끌어당겨 촬영장에서 점점 벗어나는 꼴이 되었다.
- 뭐해?
- 형 쓰러지면 저기 촬영 방해된다고 엄청 욕 먹을걸요?
그렇게 막무가내로 끌고 나오더니 그늘진 잔디광장에 앉히곤 가만히 있으라며 어딘가로 가버렸다. 진정이 제법 된 거 같아 오건말건 돌아가려 했으나 타이밍 좋게 돌아와 저에게 작은 물병을 건내왔지만 귀찮아 손을 털며 비키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럼에도 오히려 제 옆에 앉아버리는 꼬마. 뭐야, 이 새끼.
- 대학탐방온거 아냐? 너네 학교 얘들이랑 놀아.
- 음, 대학 탐방 온건 맞는데. 얘들은 없어요.
- 뭐래.
- 이미 다른 학교 갔어요.
- 근데 넌 왜 여깄어?
- 말투 봐. 재수털려서 뭔 말을 못하겠네.
- 그럼 꺼져.
와, 진짜 개싸가지. 제법 마음에 든 배우가 이 대학에서 드라마 촬영을 한다고 해 부모님이 데리러 오기로했다는 거짓말까지 해가며 다음 대학으로 떠나는 학교 단체버스에서 내려 학교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으로 따라가니 촬영을 하고 있었고 역시나 마음에 드는 연기를 하는 배우의 모습에 대학 탐방을 빠져나오길 잘했다며 뿌듯해하고 있는 와중에 작게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떨리는 손이며 가짜라며 애써 부정하는 모습에 못 볼 꼴을 본건가 싶어 촬영하는 모습을 다시봐도 별로 그래보이는건 제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몸을 휘청이는 모습에 본능적으로 그를 받쳤고 발끝에 닿은 가짜 피에 기겁을 하는 모습에 빨간색을 무서워하는건가 싶어 그를 끌고 나왔다. 이 더운날 식은땀을 흘리며 힘들어했던게 불쌍해 있어보라고 하고 물까지 사왔는데 꺼지란다. 시발, 내가 지금 뭘 포기하면서 당신이랑 있는데! 차마 입밖으로 내뱉진 못하고 일단 웃어보였다.
- 나라면 초면이라도 걱정해줘서 고맙다고하겠어요.
- 네가 좋아서 한건데 왜 내가?
- ...하아,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구요.
한숨을 쉬며 일어나길래 돌아가려는건줄 알았다. 애인이라는 형은 피봐서 죽을뻔했다고 말했는데도 반응이 없어 한숨을 쉬며 나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수업 안 듣고 글쓰고 있을거면서...놀란 가슴과 머리를 진정시키다 눈을 떴는데 코앞에 고등학생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게 그와중에 마음에 안드는지 감정이 매말랐느냐는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
- 왜 안 가고 보고있어?
- 그냥요.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라서.
- 푸흐, 어린게 보는 눈은 있네.
웃으니 보기 좋다며 따라 웃는 모습에 갑자기 심장이 다시 조여왔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자 갑작스런 스킨십에 놀랐는지 얼굴을 살짝 떼어낸다. 교복 넥타이를 잡아 당기자 중심을 잃지 않으려 자신이 기대있는 나무를 짚지만 확실히 가까워진 얼굴을 대놓고 훑었다. 대인관계따위 얽매이지 않아 사람 얼굴을 아무리 금방 잊어버리는 자신이여도 처음 보는 얼굴이고 이런 고딩은 더더욱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낯이 익고 어디서 본 것만 같아 기분이 찝찝하다못해 더럽다. 어디 아파요? 한참동안 말이 없어서 그런지 물어오는 질문에 대답 대신 입을 맞췄다. 쫄기는 커녕 먼저 혀로 입술을 핥아와 떨어지며 미간을 구긴건 이쪽이 되버렸다.
- 꼬맹이가...이름이 뭐야?
- ...아인이요.
- 모르는 이름이야.
- 알리가 없죠. 나도 형 오늘 처음 봤는데.
- 균상아!
자신을 발견하고 저렇게 멀리서부터 이름을 부르며 열심히 달려올 사람은 한 명 뿐인지라 붙잡고 있던 아인의 넥타이를 풀어주고 천천히 잔디에서 일어났다. 아인도 순순히 물러나 달려오는 그를 빤히 보다 누구냐고 물어왔고 균상은 성의없을정도로 맥없이 애인이라 대답했다.
- 와, 애인 있는데 막 뽀뽀해요?
- 섹스가 아니잖아.
오오. 기겁을 하며 떠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존경스럽다는 듯 바라봐 저도 모르게 제법 크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느새 가까이까지 온 요한은 숨을 몰아쉬며 피는 어디서 어쩌다 보았느나고 묻는다.
- 끝났으니까 신경 꺼...아직 수업시간 아냐?
- 갑자기 휴강나서...옆에 누구야?
- 은인...이라고 칠까?
엉겁결에 대면한 은인이라는 꼬마를 보고 요한은 살짝 놀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먼저 찌푸리자 아인도 덩달아 인상을 구겼고 뽀뽀한거라도 본건가 싶어 자신이 먼저한게 아니라며 해명을 하려다,
- 이방원?
기분이 확 잡치고 만다.
- 혹시 동생있어요? 분이라던가?
- ...
- 에이, 재미없네. 갈게요.
괜히 자극하고 싶어져 균상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손을 흔들자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균상과 다르게 그의 애인인 방지는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그에게 주려다 실패한 물병의 뚜껑을 제가 따며 한 모금 들이키다 하필 마주친게 이방지라는 것이 다시금 기분이 언짢아져 잔디위로 입에 머금었던 물을 그대로 뱉어버렸다.
- 저 새끼때문에 꿈꾼거였어?
간만에 꿈을 꾸었다. 제 손으로 삼봉을 끝내는 꿈. 칼을 쥔 손에 흥건히 묻은 피. 요동치는 심장. 다 끝났다는 안도감과 숨길 수 없는 묘한 쾌감. 어쩌면 정말 삼봉선생을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참나, 그의 호위무사라니...
그나마 예전에 희미하게라도 방지의 얼굴이 드러난 꿈을 꾸었으니 그가 방지일거라는 생각도 들었을것이다. 이방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아무렇지 않은척하지만 분이라는 이름에 갑자기 주먹을 쥐는 행동은 그가 전생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는걸 알려주고 있었다. 한가지 아쉬운 건 자신을 균상이라고 소개했던, 꽤나 자신의 취향인 얼굴을 한 주제에 애인이 있으면서 저와 입을 맞춘 그 패기의 형이 훨씬 낯이 익고 반가운 느낌이 들어 자신이 기억을 못 할뿐이지 그가 자신과 전생에 인연이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였다는 점이다.
- 내가 못 느낀건가...오늘은 외할머니댁에서 잘까.
아인이 자신의 전생에 대해 생각에 잠겨 뒤도 안 돌아보고 걷는 동안, 그 뒷모습을 요한은 한참이나 쫓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보았으면 피우던 담배를 다 빨고 담배꽁초를 버릴때까지도 요한은 미동이 없었다.
- 뭐야, 왜그래?
- 저 놈이 너한테 아무말 안했어?
- 말? 흠...내 얼굴이 취향이래.
못 알아본것일까. 분이까지 들먹이며 자극한 천하의 이방원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휼을 바로 옆에 두고서 그저 자극받으라며 손등에 입을 맞추는걸로 끝날리가 없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떠오른 비단옷을 입은 귀족의 사내. 환생하면서 얼굴이 변하기도하는데 그 역시도 그 얼굴이 어디 가진 않은것 같았다.
- 저 새끼랑 놀지마.
그래도 아직 그는 자신보다 온전한 기억을 갖고있지는 못한 듯 했고 이왕이면 계속, 그 상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놈, 새끼거리지마. 적어도 오늘은 형보단 훨씬 쓸모있었으니까...집에 갈래.
- 그냥 가려고? 도서관은?
- 기분 잡쳤어, 그냥 집 갈래.
- ...그래.
서로 기억을 못하면서도 이렇게 다음생에서까지 우연히 마주치다니, 참 질기고도 짜증나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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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고딩 대리님
본체님들 이름쓰니까 너무 RPS같고.....(울화통)
수업 시간, 쉬는 시간 가리지 않고 자던 학생들도 그나마 잠을 깨고 움직이는 점심 시간. 최근에 공부를 꽤 놓아서 균상은 급식을 먹는 대신 가볍게 끼니로 먹을 수 있는걸 집에서 가져와 공부하면서 먹는걸로 대신하고 있었다. 멀쩡히 잘 보고 있던 영어 문제집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덮어지고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툭하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시비를 걸며 돌아다녀 다들 기피하는 흔히 말하는 일진들이 서있었다.
- 왜 방해야.
- 야, 졸업한 변요한선배 게이라며?
- ...뭐?
저들끼리 눈을 마주치며 키득거리는 모습에 균상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멀쩡히 학교 잘 다니고 선생님들한테 칭찬받으면서 졸업한 선배가 왜 말도 안되는 소문이 퍼져있는건지 이해 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 무슨 개소리야.
- 어떤애가 그 선배가 어떤 남자랑 키스하는걸 봤데, 존나 더러워.
- 시발, 여학생들 고백 다 차는 이유도 게이라서였냐?
- 넌 뭐 아는거 없냐? 맨날 붙어다니잖아, 야동도 막 남자들만 나오는거 보냐?
남자는 어떻게 하냐? 역겹다는 듯 헛구역질하는척 연기하며 제 앞에서 굳이 얘기하는 건 무슨 경우일까. 물론 서로 아주 어렸을때부터 옆집에서 살았고 그만큼 터울없이 지내왔다. 운좋게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같은 곳으로 배정을 받아서 2살터울이라 적어도 1년은 함께 학교를 다녀왔다. 돈 믿고 버릇없이 군다는 소리를 듣는 자신과는 다르게 항상 예의도 바르고 어른스럽다며 호평의 호평속에서만 살아왔고, 대학을 들어간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을 것이었다.
물론 솔직히 말해서 그가 소문처럼 남자를 좋아한다면 자신의 입장에선 두말할것없이 고마운 소식이었다. 곧아보이는 사람이라 감히 고백을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좋아한지도 꽤 되었고 근거없는 자신감이지만 고백하면 그가 절대 거절할리 없을것도 같았다.
그래도 이런 근거없는 무근본 소문은 듣기 역겹고 짜증만 날 뿐이었다.
- 키스하는걸 어떤 새끼가 봤는데? 증거있어?
- 몰라.
- 근데 왜 나불거려, 닥치고 꺼져.
- 그 남자가 너야?
문제집을 다시 펼치기 위해 표지를 쥐었던 손이 멈추고 만다. 제 반응이 재밌는듯 또 기분나쁘게 웃는 녀석들. 고개를 들자 몇 명은 움찔하며 피하지만 주도자는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다.
- ...뭐?
- 너냐고, 크큭...시발 하긴 그렇겠다, 그 선배 너랑만 놀았는데 너말고 더 있겠냐. 야, 그래서 네가 박혀?
- 머리속에 섹스밖에 없어? 단어나 외우지 그래? 오늘도 손바닥 찢어지겠다?
- 아니라고 안하네?
- 대꾸할 가치도 없는 소리니까.
- 야, 남자랑 키스하면 무슨 기분이냐?
기어코 제 턱을 붙잡으며 고개를 들게하는 꼴은 어디 삼류 드라마에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탁,하며 손을 뿌리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팔을 치자 교실에 조금 남아있던 학생들이 전부 쳐다본다. 귀찮고 짜증난다. 제발 더이상 신경 건드리는 소리만 하지 앟았으면 좋겠다.
- 너같이 무식하고 덜떨어진놈이랑은 키스안해.
- 와, 그래서 요한선배랑은 하냐?
- 이거 이제 보니까 게이는 지면서 퍼지기 싫으니까 졸업한 선배 팔았네.
지랄 좀 작작해! 결국 화를 못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일어나기 무섭게 자신을 붙잡는다. 유치하고 수준떨어지고 더럽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비를 붙여온 녀석은 끝까지 웃으며 균상에게 뻔뻔하게도 낯짝을 들이밀었다.
- 내가 뭐가 아쉬워서 여친도 있는데 이러겠냐, 궁금해서라니까.
- 니 새끼들이랑 키스해, 나한테 앵기지 말고.
절대로 먼저 선빵은 날리지 말라고했지만 더이상 들어주고 싶지도, 상대하고 싶지도 않아 먼저 다리를 뻗어 가슴팍을 발로 차버렸다. 맥없이 곤두박질 치는 자신들의 우두머리의 모습에 눈이 뒤집혀 그대로 균상을 덮쳤고 결국 주먹질까지 이어져 다른 학생이 교사를 불러와서야 끝이났다. 그와중에 신고 정신이 투철한 녀석덕분에 반성문을 쓰고 끝날 수도 있었지만 학부모와 경찰까지 소환되어 규모는 커지고 말았다. 수업이고 뭐고 당장 균상의 부모님을 데려오라는 녀석의 어머니는 소리를 질렀지만 비행기타고 멀리나가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금방 달려올리가 없었다.
[알아서 해결해.]
- ...그럴거에요, 필요없다는데 연락한거에요.
[내년에도 집에 들어갈까말까한거 알잖니. 최대한 혼자서 해결,]
- 알아요, 주무세요.
먼저 전화를 끊어버리곤 휴대폰을 그대로 꺼버렸다.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경제적인 부분만 지원해주고 자신을 향한 사랑도 관심도 없어진 부모다. 그래도 중학교 들어가기전까진 사랑받으며 자랐지만 두 사람이 일때문에 싸우면서 화풀이를 자신에게 해버리고 자신이 요한과 그의 가족들과 잘 지낸다는걸 알게되면서부턴 워커홀릭의 부모님은 당당하게 해외파견직도 나가고 요한의 가족에게 떠넘기듯 남기고 사라졌다.
- 너 내가 학교 졸업하자마자 이럴래?
- ...뭘.
- 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야?
결국 자신이 이렇게 화가나 멍청한 놈들과 치고박고 싸우기까지 만든 장본인을 학교에 부르고 말았다. 복도 창문턱에 걸터앉아 다리를 휘저으며 바닥을 바라보는데 요한이 손을 뻗어 찢어진 입술을 만져와 크게 움찔하며 손을 뿌리친다.
- 아아아! 아파! 꺼져!
- 꺼져? 이게 형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연고를 꺼내 손가락에 묻혀 가까이 뻗으니 조금전이 따가웠는지 피해버려 가만히 있으라며 턱을 붙잡자 입술을 잔뜩 씰룩거린다. 꽤 많이 찢어져 피딱지가 져있는 입가는 연고를 바르다 살짝 딱지가 떨어지자 바로 선붉은 피를 흘려 혀를 차며 얼른 밴드를 붙였다. 피도 못 보는 놈이 피딱지가 생길정도로 치고박고 싸웠다니. 무엇보다 절대 선빵은 날리지 말라고했음에도 먼저 선빵을 날리는 바람에 이 사단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땐 절로 정신이 아늑해졌다.
- 걔네는 피 안 났냐? 피보고 또 기절하셨겠네.
- 이제 이정도론 안 기절하거든?
- 그랬어? 많이 컸네~
- ...시발.
- 입.
- 흥.
균상은 조금이라도 붉은 색이 보이면 울었다. 남들 다 좋아하는 파워레인저도 주인공이 빨갛다고 전혀 보지 않았고 붉은 옷은 죽어도 입지 않았다. 그나마 좀 커져선 심리치료를 받아 붉은색자체엔 거부감을 안 느꼈지만 피를 한방울이라도 보면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역시나 심리치료를 받고는 있지만 요한은 그가 금방 낫지 못할 것이라는걸 어렴풋이 느꼈다.
이유를 묻는다면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균상과 무휼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요한은 요한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는 자신은 요한이 아니라 이야기해왔다. 변요한이 아니라 이방지라고, 이런 이상한 세상에 살아가던 사람이 아니라며 소리를 질렀고 그의 모습에 당연히 그의 가족들은 당황했다. 정신병원에 가도 소용이 없어 잘나가는 무당에게 데려가자 그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해왔고 믿거나말거나였지만 그의 부모님들은 그 말을 믿고 그가 과도기를 잘 넘길 수 있도록 도왔다. 사실 과도기라고 할것도 없을 정도로 조용하게 지나갔다. 다만 꿈에 따르면 균상이 무휼이 틀림없음에도 자신과는 다르게 조금의 자각도 못하고 있는 그가 걱정되었고 그와중에도 기억을 못하고 있다는걸 알면서도 그저 무휼을 다시 만났다는것에 기뻐했다.
챙겨주다보니 서로에게 큰 영역이 되어있었고 무휼의 새로운 부모님은 그런 자신을 믿고 외국으로 떠났다. 47평 아파트에서 혼자 밥먹고 잠을 자면서도 절대 먼저 놀어오거나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다. 새로 태어난 무휼은 그만큼 고집있고 사람을 싫어했다.
- 일찍 왔구나.
복도에서 대화소리가 들리자 균상의 담임이 회의실 문을 열며 나왔고 회의실안에선 당장 들어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지고보면 먼저 시비를 걸며 성질을 건드린건 자신들인 주제에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만 든다.
- 네, 선생님. 일단...사과부터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 형이 왜 사과해!
누구때문에 피가 거꾸로 돌아서 이사단이 났는지도 모르면서 사과부터 하고 본다는 그의 태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들었는지 대뜸 두사람의 사이를 가르곤 복도를 내질러 달렸다. 담임이 그를 뒤늦게 불러보지만 아랑곳하지않고 시야에서 사라져버렸고 요한은 그의 철없는 행동에 한숨만 났다.
점심 시간이 끝이나 수업중인 교실에 다짜고짜 들어가선 책가방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그대로 택시를 잡았고, 집을 향했다. 순식간에 집에 도착했고 신경실적으로 가방을 던지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 나 뭐때문에 이렇게 열받고 있는거야...사춘기니?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건내며 한숨 쉬기를 여러번하다 눈을 감았다 뜨자 처음 보는 낯선 곳이 눈에 보였다.
[뭐해? 멍하니?]
형? 익숙한 목소리가 돌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거칠게 묶은 머리에 거뭇한 수염과 한복...
[도련님한테 안가봐도 되는거냐?]
도련님? 무슨 소리냐고 다시 물어보려는 찰나 휘파람 소리가 들렸고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았음에도 몸은 멋대로 소리를 쫓아 달렸다. 아, 형. 뒤늦게 그의 존재를 깨달아 등을 돌려보지만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어 잠깐 벙쪄있는데 다시 한 번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또다시 뛰었다.
가슴은 미친듯이 뛰었고
또렷해지는 누군가의 뒷모습에 자신은 어째서인지 웃었다.
- 일어나, 밥 먹어.
- 우으...
강제로 몸을 일으켜 앉게 만들어 힘겹게 일어나보니 어느새 해가 져 방은 어두워져있었다. 자신을 깨운 그는 학교에서 본 옷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고 한적도 없는 음식냄새가 집안을 가득 맴돌았다.
갑자기 잠들어서 그런지 어지럽고 잠도 금방 깨지않아 머리를 손바닥으로 주무르다보니 무슨 꿈을 꾸었길래 옹알이까지 했느냐고 물어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 기억안나.
- 그럼 말고, 너 벌점 받아서 네가 가려는 대학 경영학과 힘들데.
- 다른 낮은데 가서 전과하면 돼.
자신이 무슨대학을 노리고 있는건지도 담임이 말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균상에게 과는 별로 중요하진 않았다. 그저 요한과 같은 대학만 들어가면 되는거였고 이왕이면 자신이 흥미로운 경영이나 회계쪽이 가고싶을 뿐이다.
- 푸흐흐.
- 뭐, 왜?
- 네가 경영학과를 노릴 정도로 공부를 잘하다니.
- 아, 존나...나 원래 공부 잘 했거든? 형보다 똑똑해.
- 그러니까. 어떻게 이렇게 머리가 좋으냐고.
- 시비걸어?
- 왜 또 그렇게 되냐? 그냥 대견해서 그렇지.
대견하다는 표현을 쓰는게 맞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여말선초의 난세당시 이 나이엔 글도 못 읽던 녀석이 지금은 성적도 제법 좋아 자신은 힘겹게 들어온 지금의 대학도 수능날 미끄러지지만 않으면 충분히 들어올 정도였다. 머리를 한참 쓰다듬어주다가 손을 거두려고 하자 두 손으로 손목을 붙잡곤 멀뚱히 올려다보는 행동에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린다.
- 좋으니까 그냥 있어.
- ...근데 너 키 많이 컸다, 조만간 나보다 크겠어.
- 클거야.
- 그래, 무휼이 겨우 이만할리가 없지.
- 뭐?
- 아냐.
- 또 그 이상한 이름 나오네, 대체 뭐하는 놈이야?
자신은 유치원을 들어갔을 때, 균상은 5살이었을때. 옆집 이웃으로 처음 만났고 그가 올 것이라는걸 요한은 알고 있었다. 바로 전날 꿈을 꾸었고, 그 꿈에서 처음으로 무휼이 나왔다. 그 옛날 그랬듯이 입꼬리를 올리고 눈이 휘도록 웃으며 내일 보자고 말하던 그의 모습과는 나이도, 키도, 덩치도, 이름도 어느거하나 겹치는게 없었지만 요한은 그를 처음 보자마자 무휼이라고 불렀고 그 실수는 조금은 고의적으로 아직까지 계속 되고 있다.
균상이 심한 과도기는 안 겪더라도, 조금의 자각은 생겨서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라는 욕심때문이었다.
- ...내 짝사랑.
- 어? 뭐?
밥이나 먹자. 머리를 두어번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먼저 나왔다. 뒷모습까지 사라지고 다시 가스렌지에 불을 켜는 소리가 들리면서 멍해있던 정신이 뒤늦게 돌아온 균상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 뭐? 짝사랑? 야! 변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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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축하드리옵니다
침대에 팔자 좋게 누워선 제법 두꺼운 A4뭉텅이들을 찬찬히 읽는다. 원고를 건낸 요한은 풍선껌이 부풀어올랐다 터지고 그의 입안으로 되돌아가길 반복하는걸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기만 한다. 흐음. 전부 다 읽었는지 침대옆에 대충 내려놓곤 몸을 일으켜 앉아 요한을 빤히 응시한다. 그 시선에 못 이기는 척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위에 앉자 만족스러운듯 입꼬리를 올린다.
- 어때?
- 구려.
- 너무한다.
- 구리건 구리다고 하지 그럼, 멋있다고 그래?
냉정한 평가는 참 고맙지만 이렇게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놀리듯이 말하는건 몇 번을 봐도 속상하고 기분을 이상하게 만든다. 그래도 나름 고민하고 열심히 써서 쓴 원고들을 그에게 보여줘왔지만 단 한번도 한번에 맘에 든다고 한 적이 없었다. 당당한 그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아 늘리고 흔들자 아프다고 툴툴거리며 손을 뿌리친다.
- 어디가 이상한데?
- 나 때리지마?
- 누가 들으면 내가 너 엄청 때리는줄 알겠다.
- 아니, 처음에는 둘이 되게 멋있게 서로 돕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사랑에 빠지고 있잖아. 그게 구려.
- ...구리다는 생각밖에 안들어?
- 그럼? 이 멍청이들은 공과 사도 구분 못하고 있는거잖아.
원고를 툭툭 두드리면서 심드렁하게 얘기하지만 요한의 표정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무심하게 두드려지는 원고들이 왠지 모르게 가슴을 후벼파는 기분이 든다.
아직도 그는 조금의 자각도 없는 걸까,
2살 터울의 애인님은 어릴적부터 이웃사촌이었다가 그가 성인이 되자마자 대뜸 고백해오면서 사귀게 되었다. 꽤나 당돌하게 고백해 처음엔 굉장히 고민했다. 그가 날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어린 동생이였고, 초중고를 같이 나오고 대학까지 같이 다니게 된 마당이라서, 혹은 같은 사내라 고민을 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가 무휼이었기때문에.
균상에게 보여준 원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쓴 소설이었다. 고려와 조선, 이방원과 정도전, 무휼과 이방지...주요 인물들과 나라, 사병들은 전부 그럴듯한 다른 가명을 사용했다. 어릴적부터 또렷하게 꿔왔던 전생의 기억들과 그 당시의 심정을 솔직하게 일기장에 적으며 과도기를 극복해나갔고 다 큰 지금에야 우연히 그 일기장을 다시 발견해 조금 더 각색해서 소설로 써보았고 틈틈히 공모전에 투고했다. 이번 글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던 그 순간, 딱 그 순간까지를 담았다. 무휼이 그랬듯, 말없이 웃어보이는걸로 원고는 끝이난다. 전생을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면 이 글에 아무 반응이 없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오히려 구리다고만 말해왔다.
- 큰 일이 있잖아, 하다못해 그거 다 끝나고 평화로울때면 몰라.
- 사람들은 이런거 좋아하지않겠어?
- ...흐으으음, 지금 남주한테 엄청 몰입했구나?
자신의 전생도 기억 못하는주제에 감은 굉장히 좋았다. 어릴적 과도기때 자신이 잠깐 혼란스러웠던 그때도 귀신 같이 알아내선 요한이형 안 같다며 대성통곡을 하며 형을 돌려내라며 울었고, 평범한 운동신경이면서도 무사의 촉이 남아있는지 살기와 기척엔 예민하게 반응했다.
지금도 남들이 들으면 계산적이라고 할 부분일텐데 자신이 주인공을 변호하고 있다는걸 눈치채고 먼저 공격해온다. 당연히 철저히 내 생각을 풀어쓴 이야기인데 편을 안 들 수가 있겠느냐며 따지고 싶지만 그래봤자 알아줄리는 없어 그를 눕히며 괜히 몸을 쓰다듬고 허리를 쓸다 아래로 점점 손을 내리니 기겁을 하며 붙잡아온다.
- 아씨...우리집에선 나 만지지 말라니까? 다 개코들이라고.
- 만지는것도 안되는거야? 야한 냄새만 안나면 되는거 아닌가.
- 푸흐흐흐, 시발. 야한 냄새래.
키득거리며 웃는 그 입을 자신의 입술로 틀어막으며 아무말도 못하게 해버리자 표정이 뚱해진다. 예뻐서 해주는 키스가 아니라 훈계를 대신해서 하는 입맞춤이라는걸 알기 때문이다.
- 대학생이 욕 좀 하는게 어때서.
- 그래서, 결론은 이번것도 구리다?
- 뭐...두개 반? 여주 입장도 좀 서술해봐.
두개 반이라하면 딱히 수정을 안하고 공모전에 보내더라도 상금은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조금전의 키스로 몸이 살짝 달아올랐는지 뺨을 쓰다듬고 옷위로 가슴을 지분거려오지만 아직은 그가 먼저 이런 행동을 해오면 가끔 오히려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무휼이 먼저 이방지를 만져오며 유혹한다는게
- 글쎄...
너무도 상상이 가질 않았다.
- 상상이 잘 안가서 못 쓰겠더라고.
- 뭐야, 형이 작가잖아?
- 네가 말해줘봐. 여자주인공이 어떤 기분일거같아?
- 응?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 네가 잘 알거같으니까?
싱긋 웃으며 엉덩이를 주무르다 츄리닝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골사이를 지분거리자 몸을 꼬면서도 가슴을 살짝 밀어냈다.
- 아까 내 말 코로 들었어? 우리집은 안된다니까?
- 내 허리에 감은 다리나 치우고 말해.
흐흐흥, 형 사랑해. 학과내에서 그렇게 유아독존의 싸가지 아웃사이더로 소문난 주제에 자신과 있으면 해맑았다. 누구에게도 의존 안 하는것 같으면서도 자신에게는 의지했고 그만큼 잘 따랐고 그가 시키는건 툴툴거리면서도 군말없이 행했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 삶을 살아가는 이방지는 무휼에게 있어 가장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 낯설고 어색하지만 그는 지금 이방지를 사랑하고 있다.
이번 생에선 그의 이 감정을 만끽해도 되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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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이와 욕쟁이
블로그에 올리기엔 너무 짧아서 그냥 여기에 올리는 환생 방원무휼...찌질한 방원이랑 욕쟁이 무휼이 보고팠<<<
퇴근하고 함께 돌아가는 길에 이도를 닮은 사람을 마주쳤다. 순간 착각할 정도로 많이 닮았지만 두사람 모두 이전에 특별한 꿈을 꾸지 못했기때문에 환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인은 덕분에 평소엔 생각치도 못했던 가정이 세워지면서 불안해지고 말았다. 전생의 무휼은 이도 그를 위해 자신에게 칼도 겨누었던 사람이다. 정말 이도의 환생이 눈 앞에 다시 나타나고 기억도 온전히 가진 채, 남자를 좋아하고, 무휼과 마주치게 되면 무휼은 무슨 반응을 보일 것이고 자신은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불안과 걱정이 쌓이고 쌓여 결국 주차장으로 걸어가려는 균상의 손목을 붙잡았다.
- 자고 가요.
답지않은 불안한 눈빛에 잠만 자고 가기에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딱하다, 이방지도 이방원도 스스로에게 너무 자신감이 없었다.
- ...알았어.
그의 집은 차따위도 필요없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그 짧은 거리를 걸어가는내내 아인은 답지 않게 조용했고 겁먹었다. 소유욕의 잘못된 표현일수도 있겠다. 자신은 착해빠진 무휼이 아니기에, 궁상떨지말라며 떨쳐버리고 집을 가버릴 수도 있었다. 비밀번호를 눌러 집을 들어와서도, 균상이 먼저 씻고 와서 목욕 가운으로 갈아 입고 침대에 걸쳐앉아 아인을 올려다보는 상황에서도 그는 불안해했다.
- ...개새끼.
- 예?
- 꿇어.
갑작스러운 명령에 아인은 다시 한 번 예?하며 되물었다. 무릎 꿇으라고. 팔짱을 낀 채 다리까지 꼬고 명령하는데 살기까지 느껴졌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툭. 툭. 무릎위 걸쳐져있는 긴 다리의 끝에 있는 발이 아인의 턱을 건드렸다.
- 대,대리님?
- 아까 그거 세종아니잖아. 너도 나도 최근 몇 달 꿈꾼적도 없어, 아냐?
- ...
- 말해.
- 맞아요.
- 근데?
- ...대리님, 이도 나타나면 이도한테 갈거에요?
턱에 닿아있는 그의 발을 살짝 떼어내 발목을 감싸쥐었다. 발등에 입을 맞추고 살내음을 맡았다. 고개를 들자 가운사이로 보이는 속옷이 아찔하다.
- 대리님 진짜진짜 사랑해요.
- 알아.
- 무휼도 좋지만 역시 윤대리님도 섹시하고 사랑스러워요...다 예뻐...다 좋아요.
- ...아인아.
- 이도 녀석 나타나면 그자식 죽여버릴거에요. 뺏기기싫어...날 버리지마요.
- 아, 진짜 지랄 좀 그만해!
균상은 신경질을 내며 발바닥으로 아인의 얼굴을 뭉개고 밀쳐버렸다. 중심을 잃은 아인은 당연히 뒤로 넘어졌고 자신이 당한 상황이 이해가 안가는지 잔뜩 얼빠진 얼굴로 균상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 방지도 그렇고 왜들 이렇게 찌질한거야. 하, 진짜 짜증나.
- 어...대,대리님?
- 이보세요, 방원도련님!
- 예! 아니, 어? 뭐?
씻고 오기나 하세요, 몇 십분째 정장이야. 균상은 투덜거리며 엉금엉금 기어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아인은 그제서야 자신이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고 뒤늦게서야 샤워를 하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누워있던 균상은 갑자기 업무가 생겼는지 안경까지 쓰고서 아인의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었다. 눈치를 보며 침대에 같이 앉는데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별말안하고 키보드만 바쁘게 두르린다.
- 화났어?
- 도련님이라고 불렀다고 반말이야? 예, 화났어요. 일 들어온거 하고 있으니까 반성 좀 하고 있을래요?
- 아니...나는.
- 이방원 도련님.
- 응?
- 대군마마.
- 응.
- 전하.
- ...응.
- 상황전하.
- ...
- 저한테 10번째로 고백하셨을때, 제가 뭐라고 하면서 거절했었어요? 그 때 하신 대답은요?
아인은 10번의 구애끝에 균상과 사귀게 되었다. 처음엔 그가 무휼의 환생이라는 확신이 없었음에도 대쉬했다. 그 첫 시도 땐 그냥 싫다고 그랬고 두번째때는 연하라서 싫다, 세번째때는 자기보다 키가 작아서 싫다, 네번째때는 자기보다 돈 못벌어서 싫다, 다섯번째때는 또 다시 그냥 싫다며 성의없는 거절만 했었다. 그러다 여섯번째 고백을 했을 땐 무휼이 균상의 전생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고백의 거절이유도 그럴듯해졌다. 여섯번째엔 자신은 지금 뒤늦게 전생이 떠올라 괴롭다며 거절을 했고, 일곱번째 고백을 했을 땐 비슷한 이유로 자신은 무휼이 아니라 윤균상이고 싶다며 거절 했고, 여덟번째 고백을 했을 땐 그저 울면서 고개를 저었고, 아홉번째 고백을 했을 땐 아인이 방원의 환생이기때문에 거절했고, 마지막 열번째 고백을 했을 땐 자신의 전 애인은 방지였다고 고백을 했다. 그와 오랫동안 사귀었고, 사랑했지만 자신이 전생을 떠올리면서 방지는 만난적도 없는 방원을 견제했고 피폐해지는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방지가 먼저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했다고 했다. 생각이상으로 그를 사랑했었기에 괴로웠고, 전생에 얽히는 연을 다시 맺으면 사랑을 하게 되도 결국은 방지와 같아질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그 마지막 거절을 듣고 아인이 한 말은 단 한마디였다.
- 겁먹지마...뭐든.
- 당신때문에 머리아프고 토할거같은데도 마지막 고백을 받아준건 그 말에 힘이 느껴져서였어요.
- ...
- 너도 겁먹지마. 전에도 말했지만 방지도 내가 찬게 아니라 차였다고.
- 그자식은 지가 뭐라고 찼데요?
- 그러니까 너도 쓸데없이 혼자 소설 쓰지말라고.
- 알았어?
- ...예.
맥이 빠지는 대답이였지만 균상은 노트북을 덮어 협탁위에 올려놓고 안경도 벗어 그 위에 올려놓았다. 제 꼼질거리는 손가락만을 바라보고 있는 아인의 턱을 들어올려 입을 맞췄다.
- 나 모처럼 섹시하게 가운만 입고있는데.
- ...
- 가만히 있을거야?
- ...그럴리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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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소설
[방원무휼] - 과도기의 방원무휼
회사 사람들 모두 숨을 죽이며 회의실문앞에서 귀를 맞대고 조금이라도 세어나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애썼다. 인사팀에 다녀온 아인은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진 요상한 꼬라지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가장 멀찍이서 저혼자 팔짱을 끼고있는 동기 승연에게 다가갔다.
- 아, 아인씨. 갔다왔어요?
- 네...왜 이렇게 모여있어요?
- 계약때문에 회의중이라나봐요.
- ...아.
프로젝트로 다른 회사와 계약을 따내야하는데 다른 회사측에서 끈질기게 도가 지나친 요구를 해오는 바람에 좀처럼 진행이 안된다는건 들었다. 사실 아인네 회사가 갑이고 그 회사가 을의 입장에서 계약을 하는 것이라 이렇게까지 눈치볼 필요도 없지만 이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주기적인 유대관계를 이어가게 될 것이였기 때문에 선뜻 강하게 밀고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 누구누구 들어가있어요?
- 이과장님, 황부장님 그리고 윤대리님이요.
- 네? 윤균상대리님이요?
- 말로는 이길 사람이 없데요.
- 하하하...그렇겠죠.
아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약간은 억지스럽게 웃었다. 제 직속상관인 균상은 정말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거 같은게 융통성도 없고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납득 할 수 있는 일만을 해왔다. 하지만 그 당돌한 태도 덕분에 사원 군기 잡을때나 이렇게 제법 큰 회의에 종종 투입되는 것 같았는데 오늘도 꽤나 언쟁이 벌어지려나보다.
- 꺅!
- 다들 한가하신가봐요?
갑작스럽게 열린 회의실 문과 균상의 말에 다들 그제서야 흩어져 자신의 자리로 착석했다. 타이밍을 놓친 아인만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 인사팀은 다녀왔나요, 아인씨?
- 아, 예! 회의는 잘 하셨습니까?
- 왜 궁금한데요?
- 모두가 궁금해하는데...
아인은 아까보다는 훨씬 편하고 다정하게 웃어보였지만 균상은 여전히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나오고도 30분은 회의가 계속 되었고 양측 모두 호탕하게 웃으며 나오는걸 보면 그럭저럭 얘기가 잘 마무리 지어진 것 같아보였다.
- 잘 끝났나보네요.
- 그런거 들을 시간에 서류나 정리하시죠?
- 저 완전 잘하고 있거든요, 대리님?
- 그래요? 계속하세요, 그럼.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은채 대답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직속이다보니 남들보다도 공격 받고 일도 많아 어떨땐 남들 다 퇴근할때조차 균상없이 혼자 야근에 얼굴에 다크서클을 한껏 품은채 찌들어서 출근하기도 했지만 아인은 언제나 사람 좋게 웃으며 그과 관련해선 술이 한사발이 들어와도 헐뜯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 윤대리, 미안한데 이 서류들 먼저 해주겠나? 내일 회의때 쓸거라서 말이야.
- 이걸 다 말입니까?
딱봐도 어마어마한 양에 아인도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오늘 회의가 좋은 쪽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그 프로젝트의 시작을 위해 모아두었던 자료를 정리하는 것일거라는건 짐작이 충분히 되지만 많아도 너무 많았다.
- ...야근하라는겁니까?
- 그, 내일 출근안해도 되네.
상사가 일을 주면서도 눈치를 보는 꼴이라니 아인은 이 상황이 우스워서 그만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그가 웃자 균상은 바로 그를 흘끗 쳐다보고는 자료들을 받아내 정확히 반을 나눠 아인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 자정전으로 끝냅시다, 유아인씨.
어휴, 또 혼자서 안하네. 원래 일을 받으면 꼭 누구 한가한 사람을 잘도 찾아내서 분담을 하더니만 요즘은 아예 대놓고 아인만 찾는다. 갑작스러운 서류더미에 그는 살짝 놀라면서도 턱을 괴고 균상을 바라보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 저는 밤새도 괜찮은데요, 대리님.
뜬금없는 속삭임에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아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손으로 턱을 받치며 노골적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뜨거운 시선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먼저 돌려버렸다. 만족스러운 그의 반응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숨이 살짝 뜨거워졌다.
- 수고했어요.
목표로 삼았던 자정보다 3시간이나 일찍 일을 마무리 지었다. 마지막으로 정리한 서류들을 과장의 책상에 올려놓은 뒤 바로 운전 할 정신은 안 되는것 같아 휴게실 소파에 누웠다. 잠깐 10분정도만 잘까하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아인이 휴게실을 따라들어왔다.
- 퇴근하세요.
- 대리님은요?
- 눈 좀 붙이고 가려고 합니다만...
시원스러운 향수냄새와 함께 살짝 거친 입술이 겹쳐왔고 막을 틈도 없이 혀까지 침범해 씁쓸한 커피향을 남기고 사라졌다. 손으로 얼굴을 덮은 바람에 눈을 떴음에도 시야는 완벽히 차단되었다.
- 혼자 눈 붙이지 마시고.
- ...
- 저랑 얼굴, 입술, 가슴...
아인은 뜸을 들이더니 거침없이 균상의 허벅지 사이를 쓸었고 갑작스러운 손길에 균상은 자신의 눈을 가린 그의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 ...회사입니다.
- 네, 회사죠. 저희 둘뿐인.
아무렇지 않은척 하려고하지만 아인의 손을 붙잡은 그의 손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아인은 아이마냥 해맑게 웃어보이면서 조금전 보다 더 강하게 그를 자극했다.
- 흐...
뭉근하게 계속 자극하자 그는 서서히 반응을 보였고 자신을 노려보는 눈동자는 흥분감에 붉게 물들어있었다.
- 대리님.
- ...
- 나랑 다른거나 붙여요.
다소 거친 숨을 쉬며 선뜻 대답 못하는 그를 대신해 아인이 먼저 넥타이를 잡아당겨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 헉...하...
평소엔 무표정한 얼굴이 어느 부분을 자극하면 어떻게 일그러지는지를 안다. 뒤에서 안는 것보다 얼굴을 마주한채로 허리를 쳐올리면 더욱 부끄러워하고 동시에 뿌듯하게 반응해왔다. 그렇게 하얗고 단정한 얼굴이 지금은 자신에 의해 잔뜩 뺨을 붉히고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오로지 자신만이 볼 수 있는 흥분감에 달뜬 그의 표정이었다.
- 하...대리님...
회사 직원 어느 누구도, 심지어 그의 가족들도 그의 눈물을 본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무슨 말을 하면 이 한껏 붉어져 흥분한 얼굴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지를 자신은 알고있다. 꽤나 절정에 치달으면 꼭 하는 말이기에 아직 입밖으로 내놓지 않았음에도 지금 내뱉을 말이 무엇인지 알고 벌써부터 고개를 가로젔는다.
- 왜 그러십니까, 대리님?
- ...그 사람...찾을거잖습니까...
- 하하하.
- ...
- 맞아요.
저보다 직급이 한단계 낮은 이에게 범해지고 있으면서 싫다고 빼버리면 될 것을 그는 자존심이 벅벅 긁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면서도 단 한번도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 대리님. 아니...무휼아.
- ...흑.
- 너를 이렇게 안고,
- 아!
- 뒤를 잔뜩 헤집고 있는 내가 누구더냐? 어디 네 입으로 말해보거라.
목덜미를 잘근 씹으며 그에게 명령했다. 뜬금없는 역할극 따위가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끈끈하게 묶여있는 뚜렷한 상하관계.
- ...도...
균상에게 있어 그는 자신의 마음 한 켠에 크게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하늘이자 이상향이였으며.
- 도련님...방원...방원도련님...하아...!
- 하...그래...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하늘이었고,
- 무휼아...더 예쁘게 울어보거라.
- 흡...흐으...
유일하고도 특별한 정인이다.
[방지무휼] - 과도기의 방지무휼
정신이 없다. 주기적으로 꾸는 꿈이 단순한 개꿈이 아니라 전생의 일부가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자각한 뒤론 전생의 작은 습관 하나하나가, 꿈에서 나오지 않던 기억들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대리석 식탁이 낡은 목재식탁으로 보이고 죽도가 진검으로 보이기도하며 거울에 비친 모습이 짧은 댄디컷이 아닌 상투를 틀어올린 조선시대의 모습이기도 했다.
- 헉...하...이거 뭐야...이렇게 마구잡이로 쏟아지기 있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기억의 마지막은 자신의 죽음이었다. 전생의 기억과 똑같은 고통이 복부에 느껴졌고 감싸던 손에는 붉은 피가 흥건히 묻었다. 피를 전혀 못보는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광경이었고 그대로 균상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 균상아.
- 아...
저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자 거실 한가운데서 쓰러졌던 것 같은데 어느새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의 옆엔 요한이 있었고 짐짓 심각하게 눈썹을 찌푸리면서 자신을 쳐다보았다. 손을 뻗어 그의 입꼬리를 올렸다.
- 안 죽어.
- 왜 쓰러져있던거야? 약속에 너무 늦는가 싶더니...
- 피를 봐서...지금은 없네.
깨끗한 자신의 손을 뒤집어가며 다시 한 번 살피곤 쓰게 웃었다. 이렇게 피를 보면 기겁을 하고 쓰러지는데 전생은 무사라니, 아니 오히려 전생이 무사였기때문에 지금은 피가 질려서 못 보는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손으로 수백명을 죽였으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다싶은게.
- 무휼아.
- 도련님?
직전까지도 환각을 본탓인지 균상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반응을 보였다. 그 반응에 요한은 혓바닥을 내밀며 놀렸고 균상은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 하, 뭐야...장난치지마.
- 나도 충분히 네 이름 부를 수 있는 나이였어. 너 혼자 지금 착각하고 도련님이라고 한거야.
- 그러니까 그런 장난 자체를 하지 말라고. 왜 21세기를 살면서 14세기 이름을 불러.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사람한테. 균상은 작게 투덜거렸다. 이대로 가다간 현재의 윤균상은 없어지고 전생의 무휼만 남을 것 같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는 너무 달랐다. 무휼은 사람을 좋아했지만 균상은 사회성이 부족했고 그는 누구보다도 힘이 세고 강한 내금위장 무사였지만 자신은 검도는 그저 취미인 그저그런 회사 사무직의 청년이었다.
- 안 궁금해?
- 뭐가?
- 전생의 인연인지는 몰라도 너랑 내가 이렇게 만났고,
누워있는 균상의 위로 요한이 올라와 몸을 포갰다.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고 있을 때 요한은 눈을 감으며 저에게 다가와 키스했다.
- 사귀고 있는데.
양껏 질척이는 소리를 내면서 키스한 뒤엔 몸을 일으켜 옆에 앉고는 균상의 왼손을 잡았다. 그의 가운데 손가락엔 자신과 같은 굵기와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있었다. 그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복잡스러운 감정을 얼굴에 솔직하게 드러냈다.
- 방원이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 글쎄...
괜히 좀전에 키스한 입술을 혀로 한번 훑은 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수염 깎은 방지는 참 멀쩡하게 잘생겼다,라는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 몇살이실까...그건 좀 궁금하네.
아, 배고픈거 같아. 점심약속이었는데 벌써 저녁 시간이 되있었다. 균상은 그대로 침대를 나와 냉장고를 살폈다. 내일 카레 해먹으려고 사놓은 채소들이 보이는데 그냥 오늘 해버려야겠다싶어 봉지채로 재료들을 꺼내 올려놓았다.
- 방원이 우리처럼 기억을 갖고 있다는 보장은 없지.
- 우리처럼 얼굴도 같을까? 이상하게 닮은 사람을 하도 많이 봐서 자아분열이라도 일어나신건가 싶더라.
그 사람들도 다 방원도련님의 기억을 가지고 있나? 나도 분열되서 누군가는 내가 기억 안나는 다른 무휼을 기억하려나,하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며 물을 틀어 당근과 감자를 씻기 시작했다. 인기척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이내 균상의 몸을 돌렸다.
- 만약에 기억한다면 그자식한테 갈거야?
- 뭐?
- 그때처럼 마지막엔 이방원한테 갈거냐고.
- 그만해. 난 그냥 혼란스러운거야. 난 형이랑은 다르게 이제 막 자각했으니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모두 슬픈눈을 하고 있었다. 요한의 눈엔 두려움이 가득했고 균상의 눈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요한은 전생의 질긴 인연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균상은 그런 그가 안쓰러웠다.
- 형도 잘한건 없어, 방지때의 미련때문에 나 꼬셨잖아? 똑같이 생겼으니까 대리만족하려고.
- ...균상아.
- 시작이 어쨌건,
균상은 요한의 왼손을 잡고서 자신에게로 당겼다. 물때문에 차가웠던 손이 그의 체온에 조금씩 녹았다.
- 형은 내 집에 유일하게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고,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쪽 소리나게 입을 한번 맞추고 진득하게 혀로 한번 훑었다. 눈을 마주하자 요한이 먼저 입을 맞춰왔고 저와 비슷한 체중의 사내임에도 번쩍 안아올려 가까운 거실 소파에 그를 뉘었다. 입술이 떨어지면서 침이 드러누운 균상의 입에서 턱으로 흘러내렸다.
- 하아...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균상의 눈빛은 솔직했다. 전생이었다면 이 눈빛은 이방원밖에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스러우면서도 욕망이 가득 담긴 눈빛. 균상은 몸도 마음도 전부 요한 자신을 향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마주할땐 무신경하면서도 자신과 있을 땐 잘 웃고 상냥하다. 누구에게나 살가운것이 강아지같던 무휼은 환생한 지금은 오히려 도도하고 까칠한 고양이를 닮아있었다.
- 같은 학교 나와서 알잖아. 나 개싸가지에 안하무인인거.
- ...알지.
- 사랑해, 형. 진심이야.
아래턱, 왼쪽뺨, 오른쪽뺨, 코, 입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모든 부분에 쪽쪽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자 요한도 고개를 돌려 닿는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혀로 핥기까지했다.
- 나도...사랑해. 너무 사랑해서...미쳐버릴 것 같아.
- 왜 있지도 않은 사람때문에 무서워해.
- ...
- 안아줘, 형. 확인하고 싶은 만큼 안아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요한의 손은 바지속부터 들어가 그의 것을 움켜쥐었다. 너무 급작스럽고 강한 자극에 크게 신음을 터트렸고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요한은 상냥하게 그 두눈에 키스하면서도 아래는 여전히 거칠었다. 면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벗겨도 윗옷은 벗기지 안은채 말아올려 가슴을 빨았다.
- 아! 형!
강하게 찌르고 들어오는 아래에 절로 모아지는 다리를 강제로 벌려 허리를 감싸게 하자 고개를 바삐 젓는다.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는걸 손가락으로 버젓이 느끼고 있으면서도 버클을 풀고 지퍼만 내린채 그의 안으로 치고 들어갔다. 반밖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온몸이 그를 거부했다.
- 헉...아,아파!
- 윽, 힘 빼...착하지?
- 아! 바,방지야...제발...
- ...윤균상.
듣고 싶지 않은 그 옛날 이름에 허리를 들어올려 다 들어가지 못한 자신의 것을 강제로 박아넣었다. 균상은 고통에 신음했고 요한도 낮게 욕을 내뱉었다. 방지야. 이러지마, 방지야. 평소의 그답지 못한 거친 행동 탓인지 계속 전생과 혼돈을 일으키고 있었다. 시발. 머리칼을 움켜쥐고 잡아 당겨 얼굴을 가까이했다. 눈떠, 윤균상.
- 정신차려.
- 방지야...뭔진 모르겠지만 잘못했어, 땅새야...어?
- 야, 윤균상!
- ...
- 정신차리라고...너 누구야? 누구냐고!
- 나,나는...난...
균상은 더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눈알이 뒤집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온몸이 늘어졌고 요한의 것도 그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한심한 자신에게 화가나 애꿎은 소파만 내리쳤다. 얼마나 겁먹었으면 균상의 이마엔 땀이 한껏 맺히다 못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속옷과 바지를 다시 입혀주고 안아올려 그대로 침대에 뉘었다.
- 이미 전과가 있는데.
[미안해, 방지야.]
-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아.
처음에 그가 전생을 꿈으로 꿨을 때, 개꿈이라고 할 걸 그랬다. 너보다 훨씬 그 전생의 질긴 인연을 기억하고 있었노라고 말하는게 아니었다. 무휼이라는 기억의 퍼즐이 맞춰지는 틈을 주지 말았어야했다. 이방원. 덕분에 잘 잊고 지내던 그 이름이 요즘 들어 짜증나게도 다시 떠올랐다.
- 전생에 부부는 다시 태어나도 부부라잖아.
[내가 원체 돌려말하는걸 못해서 그러는데 말이다.]
[에이, 한두번 그러셨...제가 뭘...잘못했습니까?]
- 그럼 그만큼의 연정이면
[난 분이를 좋아하고, 입맞춤도 했어.]
[...와, 참나! 지금 자랑하시려고 부르셨습니까? 그런 자랑이라면 안 하셔도...]
[헌데 그런 내가 요즘은 분이가 아니라...]
[도,도련님.]
[너와 입을 맞추고 싶고, 너를 미친듯이 끌어안고 싶고...내 것으로 만들고 싶구나. 무휼, 너를 말이다.]
- 환생해서도 이어지는거 아냐? 내가 이정도인데?
그 날 방원은 짜증날정도로 부드럽게 무휼을 안았다. 사내의 몸으로 같은 사내를 받아들이는 것이었기에 처음은 고통뿐이였을텐데도 무휼은 한마디의 불평도 없었다. 방원은 그를 끊임없이 다독였고 고통스러워하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게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을 넘겼을 땐 방원도 무휼도 고통의 신음이 아닌 오로지 쾌락에 젖은 끈적한 신음만을 내뱉게 되었다. 훼방도 놓지 못했고 그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봐 저도 안아볼생각도 못한채 문밖에서 엿들으며 손을 흔든게 몇 번인지도 모르겠다.
- 시발...난 왜 몇백년이 흘러도 찌질한거야.
이불을 움켜쥔 그의 손은 사정없이 떨렸다. 손에 끼워진 반지는 더이상 의미가 없어보였다. 균상이 무휼을 자각한 지금, 방원까지 나타난다면 그는 분명히 흔들릴 것이다. 아니, 흔들리지 않는다더라도 자신이 그를 온전히 못 믿을 것 같다. 한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여전히 사랑에 서툴렀다.
[방원무휼방원] - 방원과 무휼의 첫만남
꽤나 주기적으로 꾸는 새로운 꿈이 있다. 날카로운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다 시야가 서서히 적응이 되면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희고 반짝거리는 설경이 펼쳐지고 산 중간쯤 어느 절벽에서 자신은 칼을 손에 들고서 고급스러워보이는 비단옷을 입은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무휼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소원하나 들어주겠느냐?]
사내는 뒤를 돌아 자신에게로 천천히 걸어오면 자신은 눈만 천천히 깜빡이며 코앞까지 다가오는 그를 피하지 않는다.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내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다.
[다음생에는 어여쁜 계집으로 태어나 이 사내 저 사내 부려가면서 편하게 살거라.]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천천히 뺨을 쓸면서 내려와 목덜미를 감싸고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게 되면 사내는 달콤한 목소리로 무휼아,하고 한번 더 제 이름을 불러준다.
예, 도련님. 이라고 대답을 하게 되면 따뜻한 그 꿈에서 깨어났다.
일찍 맞춰놓은 탁상시계의 알람보다도 제 스마트폰이 먼저 울렸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부러 숨기지않고 서슴없이 내뱉으며 누운채로 손을 뻗어 홈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 어.
[야임마, 너는 누구냐고도 안 물어봐?]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엔 상당히 아쉬움이 느껴졌다. 귀에 폰을 댄체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6시 25분.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기 딱 5분전이다.
- ...오늘 이 시간에 전화 할 사람은 뻔하니까.
[그럼 내가 무슨 말 할지도 알겠네?]
- 끊을게.
[뭐? 야!]
성가신 전화를 끊은 뒤엔 4분뒤에 울리는건 무의미할 탁상시계의 알람도 꺼버렸다. 평소보다 조금 빨리 하루가 시작됬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 수건을 얹은채 아침을 위해 식빵 두 개를 토스트기에 넣고 스위치를 내렸다. 주스를 마시기 위해 냉장고 문으로 손을 뻗는 도중 현관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한 번, 문이 돌아가는 소리가 한 번, 철컹하고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마지막으로 한 번 들렸다. 균상은 눈을 감은 채 미간은 한껏 찌푸렸다가 핌과 동시에 눈을 떴다. 다시 냉장고로 손을 뻗어 문을 여는데 뚜벅뚜벅 큰 발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들어온다.
- 짠~ 서프라이즈!
- ...가지가지한다.
- 너 또 토스트 먹으려고 그랬지? 내가 먹을테니까 넌 이거 먹어.
성욱은 자연스럽게 선반에서 즉석밥을 찾아 전자렌지에 돌리고 들고 온 보온병에 담긴 미역국을 그릇에 옮겨 닮았다. 균상이 매섭게 노려보건말건 콧노래까지 부르며 밥상을 차리더니 끝내 그를 식탁에 앉혔다.
- 쓸데없는 짓 하지 말랬지.
- 이게 쓸데없는거냐? 어차피 너 아침 안 먹으면 출근 안하고, 이왕 먹는거 어? 생일인데 어? 미역국도 먹고 어? 좋잖아.
- 후...됐어.
- 나도 요한 그놈이 부탁하지않았으면,
- 누구?
- 어? 아하하하하하하! 먹어,먹어~
요즘 듣기 껄끄러운 이름에 밥맛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성의를 봐서 성욱이 데워준 즉석밥을 전부 미역국에 넣어 말아먹었다. 검도 사범이면서 안 어울리게 요리가 취미라 그런지 그가 해오는 요리는 전부 꽤 먹을만했다. 그는 영규를 닮았고 요한은 그를 만나기 두달전부터 그와 관련된 전생의 꿈을 꾸었다고 했으니 환생은 맞을 것이나 자각을 하진 못한듯하다.
- 이새끼 끝까지 고맙다고 안하는거 봐라.
- 형도 시켜서 한거잖아.
- 야! 내가 글케 너한테 무관심하진 않았다, 임마.
소리지르는 그를 무시하고 아침식사를 마친 뒤 머리를 마저 말렸다. 출근을 위해 정장으로 갈아입으면 7시 40분. 차를 몰아 집과는 거리가 은근 되는 회사에 도착해 주차를 마치면 8시 30분정도였다. 수저 몇 번 움직이면 뿌듯해하며 갈 줄 알았던 성욱은 웬일인지 균상이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열 때까지도 집을 나오지 않았다.
- 안 가?
- 네 물건 안 훔쳐, 출근이나 해.
- ...쯧, 맘대로 해.
군더더기 없는 쌈박한 대화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균상을 보며 어휴, 저 딱딱한 새끼하며 성욱은 혀를 찼다. 대학교 검도동아리로 처음 만나 6년째 그를 보고있지만 주변사람 어느 누구도 하다못해 요한도 그처럼 냉랭하지 않은데 누구한테 배운것인지 조금이라도 잘 못 건드렸다간 목이 날아갈것만 같은 칼같은 성격이다. 제 목이 날아가는 상상을 했다가 괜히 소름이 돋아 제 팔을 한번 비비고는 보온병에 조금 남은 미역국을 적당한 반찬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모든 직원이 출근한 조용하고 빽빽한 사무실에서 관심유도를 위한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전직원이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렸고 그 곳엔 익숙한 얼굴 한 명과 군기가 바짝 선 파릇한 두 사람이 서있었다.
- 이번에 새로 뽑은 신입사원 두명이에요. 자, 인사하세요.
회사는 몇 달 전 2년만에 신입사원을 공개채용했고 오늘은 그 신입사원들이 교육을 마쳐 각자 정해진 부서로 첫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모두들 신입사원이라는 말에 목을 한껏 피면서 파티션 너머로 얼굴을 보기 위해 애를 썼다.
- 잘 부탁드립니다! 신입사원 공승연, 유아인입니다!
승연은 아직은 낯을 가리는지 얼굴을 붉히며 뻣뻣하게 인사하기 바빴고 아인은 자체가 살가운 성격인지 눈꼬리를 한껏 휘며 눈이 마주치는 상사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승연과 아인 모두 일도 대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컸기때문에 대리 옆으로 자리가 배치되었는데 어째서인지 아인팀의 대리자리로 추정되는 곳은 9시가 넘었음에도 빈자리였다.
- 저...여긴 누구 자립니까?
- 아, 윤대리 자린데 지금 외근가서 아마 회식때나 얼굴 볼 수 있을거야.
- 회식이요?
- 이거이거 초년생 티내기는. 신입사원 첫 출근인데 당연히 신고식해야하는거 아냐?
- 아하, 그런가요? 하하하!
선하고 호탕하게 웃어보이면서도 자리에 앉아선 티 안나게 한숨을 쉬었다. 못하는 편은 아니지만 눈빛으로 봐선 아주 골로 보내 당장 내일부터 지각하게 만들 것 같았다. 승연씨는 어쩌나, 제 코가 석자이면서도 입사동기에 전생의 부인이라 그런지 먼저 생각이 들고 괜히 걱정이 됬다.
- 자, 그럼 가볼까요?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5시 30분이 되었고 과장의 외침에 하나둘씩 퇴근준비를 시작했다. 아인과 승연은 그들의 행동력을 지켜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 승연씨, 그렇게 겁먹지마~ 여직원은 잔만 부딪히면 되니까.
- 정말요? 다행이에요...남자는요? 아인씨 괜찮을까요?
- 아인씨? 음...모르겠네, 내일 지각하면 다행일지도?
세상에. 승연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으며 아인을 바라보았다. 아인도 똑같은 이야기를 과장에게 이제 막 듣고 시선을 옮기다가 눈이 마주쳤다. 어떡해. 입으로 웅얼거리며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아인에 승연도 지켜보던 다른 여직원들도 어머어머하며 웃었다.
회사에서 걸어서 십분거리인 삼겹살집에서 1차는 시작되었다. 사람이 많다보니 음식점 사장님이 아예 방으로 안내를 해주었고 신입사원들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정말로 여직원은 건배만 하면 그 뒤론 마신들 안 마신들 터치하지 않았지만 아인은 전부 털어마시고서 머리위로 잔까지 흔들며 열정적으로 마시고 또 마셨다.
- 그 놈 이름 한 번 별나네, 누가 지어줬나?
2년만의 신입사원이라서그런지 어린 사내자식들이 놀리듯 딱 그정도로 유치하게 이름을 가지고 시비를 걸고 너무 잘 생겼다며 시비고 키 크다며 시비고 첫출근인데도 별거가 다 불만이고 시비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은 시비 하나하나를 소주잔에 받아가며 아무 반항없이 꿀꺽꿀꺽 잘도 받아마셨다.
- 저 같이 진국인 남자 보기 힘듭니다~ 절 채용하신건 완전 잘하신겁니다요, 흐흐흐.
- 하하하하! 그래, 신입사원은 이런 맛이 있어야지! 균상 그놈은 너무 꽉 막혀서 재미없었어~
윤균상, 어째 오늘 처음 듣는 이름인데도 어딘가 모르게 그리운 느낌에 그가 빨리 이곳에 나타나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니, 누구라도 좋으니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으면 했다.
아인은 신기가 있던 외할머니의 여파였을까,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전생의 꿈을 꾸었다. 전생의 기억은 꿈보단 평소에 갑자기 머릿속을 흘러들어왔고 꿈은 새로운 전생의 인연이 닿을때만 관련이 있는, 혹은 없는 꿈을 바로 하루전에 꾸었다. 민씨부인과 아버지와 형들이 그랬고 그런 그가 바로 어제 새로운 꿈을 꾸었다. 필시 오늘 누군가가 새로이 제 앞에 나타날것이었다. 그전까진 절대로 취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오기로 버텼다.
한 차례 소주세례가 끝이나고 고기며 안주등을 먹어가며 속을 달랬다. 육체도 정신도 회복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려 모든 직원들의 시선은 문으로 향했다.
- 어머, 대리님오셨어요?
- ...예, 과장님이 서류 직접 전달하라고 하셔서.
- 그래그래. 여봐라~ 신입들 뭐하냐, 윤대리님이 오셨는데?
- 아, 처음 뵙겠습니다! 공승연이라고합니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유아인이라...
윤균상대리의 얼굴에 아인은 안그래도 큰 눈동자가 더욱 커지고 말았다. 균상도 아인과 승연을 보고 살짝 눈동자가 흔들리긴 하였으나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계속 서있을겁니까?
- 아, 아닙니다!
균상은 무표정으로 제 가까이에 놓인 소주병을 들어 아인의 앞으로 내밀었고 아인은 바로 잔을 들어 술을 받았다. 승연에게도 똑같이 병을 내밀었지만 잔에 술이 남아있던 그녀는 당황해하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 앉은 여직원이 대신 마시겠다며 술을 받았다. 그가 술병을 놓자마자 아인이 바로 다시 들었다.
- 대리님, 제가 한 잔 드리겠습니다.
- 아뇨, 차 가져왔어요.
- 에이, 그래도 신입사원이 주는건데 받기라도 하지.
- 그럼 과장님이나 받으시던가요.
냉랭하게 대꾸하며 균상은 물을 마시려는건지 뒤집어져있던 물컵을 돌렸고 아인은 바로 눈치빠르게 소주병을 내려놓고 물병을 들어 물을 따랐다. 그의 행동에 고맙다고 하긴 커녕 쓸데없는짓하지 말라고 싸늘하게 대하였지만 아인은 그저 반쯤 정신나간듯이 웃을뿐이었다.
- 하여튼 윤대리랑은 재미없어서 회식 못 하겠다니까.
- 안 부르시면 되겠네요.
- 저거저거 말하는거봐라. 유사원, 저 대리 밑에 있다고 저런 싹퉁바가지짓거리에 물들면 안되는거다!
- 아하하하하...
- 신입이 제 밑입니까?
아인을 보는둥 마는둥하던 균상이 그제야 그와 눈을 마주했다. 턱을 괴고 자신을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다른사람이였으면 충분히 기분이 나쁠수도 있는데 오히려 나쁘긴 커녕 자신을 봐주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가 변태인가 생각이 들정도로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아니, 그가 자신을 봄으로써 뭔가를 깨달아주길 바랬다.
싹싹한 그의 성격은 능률면에선 몰라도 화합쪽에선 적응을 잘 할 것 같아보였다. 아무말없이 대놓고 스캔하고 있음에도 술을 얼큰하게 마신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오히려 따뜻해보이기까지했다.
사실 아인과 승연의 외모에 적잖이 놀랬다. 두 사람은 각각 상왕과 정비마마를 닮아있었지만 전생이 같다는 보장도 없고 얼굴과 전생이 매치가 안 되는걸 지란형님을 통해 경험했다. 적어도 그가 상왕이라는 확증이 있지 않는 이상 달라지는건 없었다.
신입이 들어왔고, 귀찮아졌을뿐이다.
조용히 스캔을 마친 균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채 재미없으니 그만 가보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과장이며 부장이며 어딜가느냐고 했지만 외근때문에 피곤하다는 추가 핑계까지 대면서 기어코 나갔다. 아인은 뒤늦게 화장실을 갔다온다며 방을 나와 밖까지 달려나왔다. 균상은 이제 막 차에 타려고 차문을 열고 있었다.
- 대리님!
대뜸 소리부터 지른뒤에 바삐 그에게로 달려갔다. 생각보다 먼거리에 숨이 차 헐떡이면서도 아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 저...우리...만난적 있지 않아요?
- ...비슷한 얼굴은 몇 번 본적이 있어요.
- 아니 그런거 말고...훨씬 훨~씬 더, 그러니까...예를 들면 고려나 조선...
- 유아인씨.
- ...예, 대리님.
- 술 적당히 드시고 지각할거 같으면 회사 휴게실에서 자요. 신입이라고 안 봐주니까.
새로운 헌팅방식인건가, 그래도 여지껏만난 사람 중 가장 그를 많이 닮았으니 충고 한 마디하고 운전석에 앉았다. 더 무슨 말을 하고싶어하는 표정이었으나 아랑곳하지않고 차를 몰았다. 그의 차는 순식간에 거리에서 사라졌다.
죽도가 시원스럽게 부딪히는 소리와 우렁찬 기합소리가 들렸다. 30분을 쉬지않고 몸을 움직이다가 성욱이 먼저 항복을 외치며 호면을 벗었고 균상도 뒤이어 벗었다. 두 사람 다 얼굴은 땀범벅에 숨소리도 굉장히 거칠어졌다.
- 헉...허...갑자기 뭐냐?
- 하...하아...기분이 별로여서.
기분이 별로다. 표현을 이렇게하는게 맞는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서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할지도 감이 안 잡힌다. 여지껏 욕을 하고 모진말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아인의 놀라는 표정에 피가 식는 느낌이 들었다. 겨우 많이 닮았다는 것 때문에 흔들리는 자신이 기분이 나빴다. 그래, 별로가 아니라 나쁜것이었다. 요한이 걱정하던 가설을 스스로가 입증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기분 나쁨이었다.
- 그럼 혼자 풀지 날 왜 불러?
- 안 움직이는건 재미없어. 그리고 형 아니면 나 못 받아주니까.
[무휼아.]
- ...나 불렀어?
- 안 불렀어, 임마. 먼저 씻을테니까 네가 정리해.
평소 같으면 꺼지라며 하지도 않았을것을 오늘은 웬일로 순순히 보호구들을 정리하는 균상의 모습에 제가 오늘 미역국에 뭘 잘 못 넣었던 것일까하는 요상한 걱정까지 들었지만 찝찝한 땀을 닦아내기위해 샤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꼬시려고 한말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하필이면 고려와 조선일까. 그리고 그 질문을 하는 아인의 눈빛은 묘하게 확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눈빛에 가슴 한 켠이 저도 모르게 간질거려지는게 기분이 또 나빠져 괜히 들고있던 자신의 호면을 던져버렸다.
- 야! 멀쩡한 보호구 왜 던져!
- ...나 갈래.
- 어? 뭐? 씻지도 않고? 야!
하필이면 꿈을 꾼 날 바로 아인을 마주한 탓일까 균상은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크러뜨리다가 차에 시동을 걸었지만 손이 진정이 되지 않아 얼마 가지 못해서 차를 멈추고 말았다. 피곤해서 집은 가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결국 한숨을 쉬며 떨리는 손으로 단축키를 눌러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신호음이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받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일이야?]
- 이대로 운전하다간 죽을거같아서.
[하...어딘데?]
- 검도장에서 많이 못 왔어.
운전석에 몸을 기대 누워있는데 전화를 마친지 정확히 15분 뒤 누군가가 차창을 두드렸다. 얼굴을 확인한 균상이 차문을 열었고 상대를 헛웃음을 뱉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 금방 왔네? 하긴 성욱이형이랑 검도장 위에서 살지?
요한을 향해 양 팔을 뻗어보이자 그는 한숨을 쉬면서도 상체를 숙여 팔이 목을 두를 수 있게 해줬다. 그대로 허리를 감싸고 두 다리를 한꺼번에 안아올려 운전석에서 나오게 한 뒤 트렁크위에 그를 앉혔다. 위에서 반쯤 정신나간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몸을 양 팔로 가두며 올려다보았다.
- 나 아직도 단축키 형이더라.
- 전애인한테 이렇게 야심한 밤에 전화하기 있어?
- 먼저 쿨하게 친구해준다며. 나 죽게 둘거야?
무휼과는 다르게 윤균상은 참으로 뻔뻔했다. 본인이 필요하면 어느 누구라도 불러댔다. 설령 그 사람이 한달전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떠나보낸 전애인이여도 오늘처럼 이렇게 당돌하게 웃으며 소환하는 사람이었다. 기가 차서 요한도 웃음밖에 안나왔다.
- 무슨일이야?
- ...아, 말하면 화낼건데...
말끝을 고의적으로 흐리긴했지만 눈빛은 둘러댈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앨리스를 조롱하는 체셔고양이처럼 개구져보이기까지하다.
- 정비마마랑 상왕 닮은 사람이 신입으로 들어왔어.
- ...
- 와, 꿈틀거리는 거봐.
- 꿈은?
- ...꿨어, 두달쯤 전부터 사나흘간격으로. 누굴 뜻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 꿈하나에 사람이 한 명이진 않아, 두명일수도, 그 이상일수도 있어.
요한의 표정은 굉장히 심각했다. 하긴 만약에 유아인사원이 정말로 이방원이라면 방지때처럼 한동안 후폭풍에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본인은 아직 보지도 않았으면서 이렇게 아파하는건 전생의 정이 있고 한때 애인이었던 그였기에 조금 딱해보였다.
- 왜 스스로를 고문해. 그거 그 사람이 맞을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뺨을 쓰다듬자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한달전이었으면 핥으며 야하게 저를 꼬셨을수도 있었을텐데, 요한도 그 오랜 습관이 남아 움찔거리고 있는게 뻔했다. 쓰다듬던 손을 거두고 차에서 내려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그러곤 요한을 향해 살짝 웃으며 뒷좌석에 앉아 그가 문을 닫기위해 다가올때까지 문을 닫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
- 다시 시작 할 맘도 없으면서 전애인한테 키스해달라고 하면 안되겠지?
균상의 도발에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요한은 그를 살짝 밀어 뒷좌석에 함께 앉아 문을 닫고는 입술을 훔쳤다. 진하게 몸에서 뿜어나오는 땀냄새는 자극적이었고 찝찔한 그의 목을 한껏 핥았다. 오랜만에 받는 자극에 균상도 순간적으로 신음을 뱉다가도 다시 그를 살짝 밀었다.
- 뭐야?
- 생일선물.
- 차에서 하려고? 진빠져서 졸음운전하면 어떡해.
- 같이 죽지 뭐.
- 너무한다. 나 이번 생은 편하게 죽고싶었는데.
섹스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몸과 머리가 멈추면 자꾸만 아인의 모습과 꿈에서 소원을 빌던 방원의 모습이 눈에 훤해서 머리가 깨질것같았다. 흔들리는 눈빛에서 요한도 충분히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그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애무를 하며 흥분에 젖어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지속적인 반응에 결국 균상은 지쳐서 잠이 들었고 요한은 그제서야 마지막으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차를 몰았다.
4차까지 미친듯이 달리고나니 새벽 2시가 훌쩍 넘었고 균상외에는 새로운 사람을 마주치지 못했다. 머리가 깨질것같고 이대로 잠들면 내일 지각할 것 같아 회사근처에 얻은 자취방에서 대강 씻고 옷만 갈아입은 뒤 회사로 출근했다. 휴게소엔 당연히 아무도 없었고 소파에 몸을 뉘었다.
- 윤균상대리...
아인은 가장 최근에 마주친 균상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외모도 목소리도 완벽한 무휼이었지만 묘하게 성격이 달랐다. 처음이라 낯설어서라기보단 원체 사회성이 없는 사람같아보였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은 전부 전생과 외모는 물론이고 꽤나 유사한 성격을 소유했는데 균상은 심하게 뒤틀린 기분이었다.
- 흠...뭐, 떠보면 되는거지. 자각 못하면 할 수 없는 거고.
어차피 그는 같은 회사에 직속상관이었다. 마주치기도 많이 마주칠 것이고 기회는 많았다. 내심 그가 외모뿐만 아니라 정신도 무휼이 깃들어있길 바라며 천천히 눈을 감은 방원은 몇 번 숨을 고르면서 금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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