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사계의 팔자는 단순했다. 의뢰를 받는다. 수행을 한다. 성공하면 또 다른 의뢰를 받는 것이오, 실패하면 그대로 자결한다. 왜 죽여야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에게 의뢰를 받았건 그저 돈을 받으면 행동으로 옮겨야했고 그렇게 누구든 죽였다.
- 죄송합니다. 오늘은 손님이 너무 많아서요.
거의 달포는 되는 것 같다. 이번엔 이곳의 대방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무예를 익힌 사람들도 많아서 기척에 예민했고 좀처럼 틈이 생기지 않았다. 상냥하게 웃으면서도 낯선 기척엔 대부분의 기녀들이 빠르게 눈을 돌렸다. 조금이라도 살기를 드러내면 바로 경계했다.
- 으응? 뭐지, 누가 온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 뭐하니? 어서 들어오지않고.
- 네, 대방.
풍성한 치마를 안으며 걷는 그 앞엔 화려한 장신구와 옥반지를 낀 초영이 서있었다. 손님을 기다리게 해서야 되겠냐며 약하게 혼을 내곤 방으로 들어가는 그를 보고 온화하게 웃다가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가장 빈틈을 보이지 않은건 역시나 대방이었다. 조금이라도 칼을 의식해 손에 힘이 들어가면 이쪽을 바라보았고 숨까지 참으며 기척을 숨긴적이 수어번. 대방은 강하다. 사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은 대방을 이길 수 없다. 그럼에도 계속 맴돌며 기회를 넘보는건 돌아가봤자 죽음인건 마찬가지이기 때문.
- 오늘은 이만하자꾸나.
평소에도 몇 번 먼저 잠자리에 들러가곤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도 일찍 방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오늘밤 성공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기척을 최대한 죽이며 뒤를 밟았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불부터 꺼버려 환한 복도와 다르게 어둑했고 방의 문을 열자, 예상했던바와 똑같은 흐름으로 진행되었다.
대방이 먼저 벽사계의 목에 칼을 겨누었고 벽사계는 그대로 발목을 잡혔다.
- 이렇게까지 무방비하게 당할수가 있나.
- ...예상했으니까.
- 흐음.
금방이라도 죽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목소리엔 두려움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가싶더니 칼을 거두고 초에 불을 다시 붙이는 그 긴 시간까지도 저를 죽이기 위해 먼저 달려들지도 않았다. 이상하다. 침상에 앉아 가만히 올려다보는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는것 같다가도 금방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다.
- 날 죽이러 온 것이 아니었나? 네 기척은 꽤 오래전부터 느꼈는데.
- 틈이 없었으니까.
- 그래?
대방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으로 칼이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에 놀라 몸을 뒤로 뺀건 벽사계였다. 지금은 틈이 보이느냐? 여유가 느껴지는 웃음에 입술을 물며 고개를 저었다.
- 이름이 사광이지?
- 어찌?
- 정보로 밥벌이를 하는데 이정도가지고.
- ...
- 그렇게 서있지말고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 ...
- 이대로 돌아가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니, 네가 아는 지재나 어디 팔아보렴.
사람 죽이는 것 밖에 한 것이 없어 지재라고 팔 수 있는것도 없었다. 당신 이전엔 누굴 죽였고, 누굴 죽여달라고 의뢰를 받았는데 그건 누가했으며 처음으로 죽인 사람은 누구인지, 가장 힘들었던건 일, 가장 쉬웠던 일, 가장 비쌌던 일, 돈 없이 했던 일. 하나씩 말할 때마다 하루, 이틀, 달포씩 늘어났다. 사실 저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건 진작부터 알았다. 그래도, 시키지 않아도, 온갖이야기를 했다. 이따금씩 놀란듯한 표정과 측은하게 바라보며 위로해주는 그 말이 좋아져버린 것이다.
- 윤랑...어떻느냐.
- 무슨?
- 내게 오라는 말이다.
말이 안 되는 제안을 들었을 때, 방안을 밝게 만든건 손가락만한 초가 아니라 손바닥으로도 못 가리는 태양이었다.
- 어찌 그러셨습니까.
- 무엇이?
- 벽사계말입니다.
- 벽사계라니, 그런 자가 우리 화사단에 온적이 있더냐?
- 대방.
- 흐음, 그러게나 말이다...내가 왜 그랬을까?
벽사계에게 부탁해 자신을 죽여달라고 한 자가 있다는걸 들었다. 바로 찾아내 추긍하자 시덥지않은 소릴하며 변명을 늘여놔 들을 가치도 없었지만 이미 의뢰를 받은 벽사계는 무리를 빠져나왔다기에 가만히 기다려보았다. 제법 실력이 있는지 살기를 느껴 경계하면 바로 기척을 죽여왔다. 그리고 신중한지 빈틈이없을땐 시도조차 하지 않다가 마음을 비운것인지 대놓고 만든 덫에 순순히 붙잡혀 처음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벽사계들은 원래 검은 옷을 입는게 아닌가?'
'당신 화사단들도 검은 옷이던데...밤에 유리하려고 그렇게 입는거야?'
'몸을 숨기기엔 조금 더 수월하니까.'
'들키면 빨리 끝내버리면 되는거야...그래서 색은 상관없었어.'
저와의 실력차이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거면서 하는 소리가 겁이 없고 당당해 그만 크게 웃어버렸던것 같다. 괜히 칼만 만지작거리는게 참 어리다는 생각도 했던거 같다.
연무장에서 홀로 연습하는 무휼의 폼이 영 어정쩡하고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누가봐도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고 좀처럼 집중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어 조용히 지켜보던 방지는 결국 한숨을 쉬며 무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아예 목검을 내려놓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명치부근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 쓰읍...아, 왜 이러지...
- 뭐해?
- 어, 방지야.
제 아픈거에 정신이 쏠려있다보니 방지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답답한 가슴때문에 급기야 주먹을 쥐고 쿵쿵 두드려보지만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어 입이
절로 튀어나왔다. 머리위에서 왜 그러냐고 방지가 물어오는 소리에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자 맞은 편에 조용히 앉아 말해보라는듯 턱을 살짝 움직인다.
- 아니 자꾸 여기가 묵직하고 답답해서.
- 아까 점심때문에 체한거 아냐?
- 체하는게 뭐야?
- ...지금 그러고 있는거.
- 헉, 진짜? 나 그런적 한 번도 없는데...이상하네, 오늘은 왜 체했지?
- 나야 같이 없었어서 모르지...손이라도 따볼래?
- 따? 어떻게?
- 바늘이나 날카로운걸로.
날카로운거. 바늘까지 빌리러 가기엔 은근 거리가 있어 대체할 날카로운걸 찾아보지만 눈에 쉽사리 들어오지 않았다. 나무 잔가시들은 널렸지만 그런걸로 잘못찌르면 손가락이 아예 썩어들어간다고 할머니가 예전에 겁을 잔뜩 줘서 감히 해볼 생각도 안 든다. 문득 시선이 닿은건 방지의 칼이었지만 시선을 느꼈는지 칼을 조금 빼내며 이걸로 하겠냐고 물어오는 방지에겐 살기가 느껴져서 고개를 다급하게 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나 갑분이한테서 바늘 빌려올게!
그 자리에서 바로 손을 따주려는 갑분이때문에 놀라 다급하게 괜찮다고 하니 바늘이 작아서 잃어버릴 수 있으니 어디 가지말고 여기서 하고 가라며 저는 다른 일때문에 사라졌다. 다행히 뒤따라온 방지가 무휼의 손가락에 매듭을 조금 묶어주니 묶여서 피가 안 통하는 탓에 조금 붉어진 제 손가락을 보며 입을 삐죽인다.
- 이제 어떡해?
- ...무서워?
- 뭐? 하! 내가? 아닌데? 완전 아닌데?...아!
- 검진 않네.
- 아...아파...씨, 아프잖아....
갑자기 찔린 바늘에 매듭이 풀려 피가 통하자 조금 저릿한 느낌도 들어 몸을 떨자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잽싸게 돌리니 역시나 범인은 방지였다.
- 팔다리에 칼 베어봤으면서 엄살은.
- 아픈건 다 똑같거든?
오만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는게 어린아이 같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체하면 검붉은 피가 올라오곤 하는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그렇게 심하게 체한건 아니였는가싶기도 해 아니었나,하고 작게 중얼거리자 바로 일부러 찌른 거냐며 억울해 괜히 그렇다고 대답하자 어떻게 아픈거가지고 장난이냐고 침울한 표정을 짓는다. 손가락에 작게 맺힌 핏방울은 떨어질 생각도 없이 손 위에 가만히 있었다. 딱히 닦아줄만한 천도 없어 주위를 조금 두리번 거리다 혀를 내어 피를 닦아내자 놀랐는지 무휼의 손가락이 움찔하며 떨린다.
- ㅇ,야...뭐해...
- 멈춰야할거아냐.
- 아니 그냥 천으로 닦지...내 손 더러우면 어쩌려고...
- 닦을만한게 안 보이잖아, 옷은 더럽고.
워낙 작게 맺힌 핏방울은 몇 번 핥지 않아도 금방 없어져 더이상 피가 올라오지 않았다. 손가락의 붉은 기운이 얼굴로 몰렸는지 잔뜩 열이 오른 무휼의 얼굴을 방지는 모르는척하며 금방 다시 돌아온 갑분이에게 잘 썼다며 바늘을 건내주었다.
아주 조금의 돈만 더 모였더라면 값비싼 주거복합단지를 이루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그저 거의 다 지어졌지만 사람이 살지 못하는 폐건물, 뼈대도 세우지 못한 채 땅만 고르게 정리된 공터. 이 곳은 방원의 집이자 직장이였고 은밀하고 위험한 곳이었다. 진로를 방해하는 썩어가는 시체들에 방원을 쫓아 여기까지 들어온 당사자는 역겨운 냄새에 구역질날 것 같았다.
- 하아, 적당히 발악하고...좀 뒤져.
- 헉...내가 죽으면 너네 조직은 더 난리날걸?
- 아니니까 좀 죽을래?
- 네가 먼저 죽을 것 같네. 여기가 어디라고 따라와.
눈을 가려도 앞에 뭐가 있는지 훤히 보일 정도로 이 곳은 방원에게 익숙했다. 아주 어릴적부터 비밀아지트 같은 곳이었고. 지금도 좋은 공간인건 변함이 없었다. 비록 유쾌하고 즐거웠던 추억위로 나이를 먹고 깨끗하지 못 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추악하고 비열한 악행이 씌워져가 예전의 따뜻함은 사라졌지만 이 곳만이 유일하게 방원이 의지할 수 있는 장소였다.
욱신거리는 갈비뼈 부근을 손바닥으로 짓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이어가지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쉴때마다 죽을 맛이다. 무턱대고 저를 쫓아올만큼 단순한 상대는 몇 마디 안 되는 도발에 품에 숨겨두었던 총을 꺼내 방원의 이마를 향해 겨누더니 그대로 매섭게 노려보았다.
- 머리 뚫어버린다.
- 그거 너만 있는거 아냐.
- 네가 꺼내기전에 죽ㅇ,
호기로운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상대는 말을 더이상 이어가지못하고 쓰러졌다. 이질적인 총성과 함께 뒤에 가려져있던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 ...아.
혀를 차며 총을 품안으로 다시 넣고는 쓰러진 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발작하듯 몸이 몇 번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고 혹시나싶어 코근처로 손가락을 대보지만 손끝에 닿는건 추운 겨울바람뿐이었다.
- 공포탄이 아니었나보네...미안해서 어쩌나.
영혼없는 변명에 저까지 기운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휼. 무전기를 꺼내려던 무휼은 이름을 부르자 시선을 돌리는가싶더니 아예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 무슨짓이야.
- 말 그대로야. 공포탄인줄 알았어.
- 그걸 지금 뻥이라고 치는거야?
- 그래도...형이 살았잖아.
- 너 이러면 공범이야.
- 우리 여기 정말 좋아했는데...그치?
복귀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얼핏 보이는 방원의 모습에 뒤를 쫓아오긴 했지만 사실 이 곳에 발을 다시 딛은 건 10년만에 처음이었다.
- 멀쩡한 문도 따보고 비비탄총가지고 스파이놀이도하고.
철없던 시절의 놀이가 떠올라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든 재밌던 때. 지금처럼 관계가 틀어지지 않았던 때. 두 사람은 이웃사촌이였고 친형제보다도 가까웠다.
- 이제와서 추억팔이하고 싶지 않아. 내가 무슨짓을 했는지 잊었어?
하지만 그 관계는 방원으로 인해 틀어지고 말아, 무휼은 그대로 이 곳을 다시는 찾지 않았다.
- ...그걸 어떻게 잊어. 그 때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형 죽여버리고 싶어.
방원의 말에 머리로 모든 피가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달콤한 추억 위로 쓰고 구역질나는 악몽같은 추억이 다시 얹어졌다. 주저앉아있는 방원의 멱살을 잡고는 들어올려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방원은 반동으로 몸이 기울면서도 그와중에 다리를 들어 무휼의 허벅지를 강하게 찍어눌렀다. 체중이 더해져 완강히 버티기엔 무리가 있었고 결국 한 쪽 다리가 꿇어졌다. 멱살을 잡던 손이 풀어지면서 방원은 조금 휘청이긴 했지만 금방 중심을 잡고 무휼을 내려다보았다.
- 하아...근데 왜 도와줬어. 안 그랬으면 머리에 총 맞고 죽은 사람은 저 녀석이 아니라 나였을텐데. 내가 이대로 네가 날 도왔다. 형사 윤무휼은 공범이다...이러면 어쩌려고?
- 난 정말 미치게 형을 죽여버리고 싶어.
'윤무휼, 어디야? 무전들리면 빨리 복귀해.'
- ...근데...그런데...
독기서린 눈빛과는 다르게 위태로운 목소리에 하마터면 옛날처럼 껴안고 위로해줄뻔했다. 한 번 들리기 시작한 무전은 근방에 있는지 제법 여러번 소리가 들려왔고 모두 무휼의 복귀지시를 내리는 내용이었다.
- 그럼 너한테 받는 마지막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치자.
자켓안으로 보이는 무전기를 꺼내 이 곳의 위치를 알렸다. 정말 코앞에 있었는지 바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고 자신의 행동에 무휼은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언제봐도 참 멍청한 표정이구나. 망신창이인 몸이라 힘이 없어 웃고 싶은데 웃는것처럼 보일지는 확신이 없었다.
- 뭐한거야?
- 너 복귀하라고. 난 안 잡힐거야.
무전기를 다시 품에 넣으면서 이번엔 총을 잡았다. 빼내려는 손을 붙잡으며 그대로 수갑을 채워버리는 행동에 눈을 마주하자 보란듯이 자신의 손목에도 수갑을 채워버렸다. 퍽 가까워진 사이렌소리는 건물주변까지 왔는지 뚝 끊어지더니 또 다시 무전이 들려왔다.
'무휼. 너 그자식들이랑 같이 있는거야? 무사해?'
- 무사하냐고 묻잖아. 가서 무사하다고 해.
- 혼자 안 가.
- 그럴리가.
수갑이 채워진 손을 역으로 밀어 무휼을 눕혀버리곤 위에 앉아 내려다보았다. 끙끙거리며 일어나려 발버둥쳐보지만 한쪽손이 붙잡힌채 움직이기엔 한계가 있었고 방원은 보란듯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가싶더니 그대로 여유롭게 수갑을 풀어버렸다. 무휼에게서 빼앗은 총을 그대로 품에 넣으며 천근같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회식을 다양한 핑계로 빠지는 건 일상이었지만 약속때문에 빠져보긴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다. 회사에서 조금 걸어내려오다보면 보이는 건물 지하의 가게는 꽤 고급져보이는 레스토랑이지만 가격은 보기보단 부담이 적어 종종 애용하는 곳이었다.
- 그럼 그렇지, 또 술이야?
책꽂이 바로 옆자리. 수량부족으로 추가 주문한거라 혼자 원형인 2인용 테이블. 마지 지정석인것처럼 항상 그 자리만 고집했고 오늘도 무휼은 자신이 오기 전까지 감자튀김과 샐러드와 함께 먼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 왔어?
- 건전한걸로 좀 불러봐라. 성인되니까 술 아닌걸론 못 부르겠어?
- 너가 술 아니면 안 오잖아.
- 못 오는거야.
유일하게 자신과 호각으로 마시는 녀석인데 약속시간에서 겨우 2분 늦었음에도 벌써부터 얼굴이 제법 붉은게 아마 무휼은 시간보다도 훨씬 일찍 이곳에 도착해서 먼저 꽤나 마신듯해보였다. 맞은 편에 앉으며 얼마나 마신거냐며 잔소리를 하려는 찰나 또 입안으로 들어가려는 무휼 잔을 빼앗아 한 모금 삼켰다. 콜록. 오랜만에 마셔본 양주라 저도 모르게 기침이나 목을 풀자 키득거리며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포크로 감자튀김을 찍어 건내 그대로 입에 넣었다.
- 그래도 내가 가장 파토 안내는 게 너랑 잡은 약속이야, 알아?
- 응...알지.
방원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지나가는 웨이터에서 잔을 하나 더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주로 집에서 외주를 받으며 일하는지라 캐주얼하게 입은 자신과는 다르게 경영팀이라 미팅도 잦아 언제든 깔끔하게 보여야한다고 투덜거리던 그는 오늘도 깔끔한 짙은 남색의 정장에 머리도 시원하게 넘겼지만 답답했는지 넥타이가 조금 내려오고 목을 답답하게 조였을 단추도 풀어져있었다. 오늘 회식이라고해서 안 올 줄 알았다고 말하니 말도 말라며 주인공이 빠진 회식이 말이되냐며 상사가 눈치준거 빠져나오느라 죽는줄 알았다며 칭찬해달라는 듯 바라봐 샐러드를 찍어 건내며 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 너 선 본다며.
- 아, 영규형한테 들었어? 이미 봤어...시간강사긴해도 교수래.
- ...
- 왜, 나만 먼저 장가가게 생겨서 배아파?
차라리 그런거였으면 좋겠다.
방원이 또 선들어 왔더라. 며칠전 검도장에서 같이 몸을 풀다가 영규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방원의 아버지의 기사노릇을 하고 있다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잘 전해들었고 워낙 셋은 어렸을때부터 친했던지라 서로 먼저 들은건 알려주고 그 사실을 물어도 숨기고 거짓으로 말한다던가 그런건 없었다. 요 몇 년 가장 많이 세 사람 입에서 오르내린건 방원의 선이었다. 그렇게 매너 좋게 행동하면서 어째서인지 항상 싫다며 파토내는건 상대쪽이라 모두가 미스테리하다고하지만 정작 방원은 일이 더 중요하다며 신경쓰지 않는 듯 해보였다.
그리고 깨진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항상 안도하며 위로하는 척 하고 옆에 있던건 무휼이었다.
- 말은 지금까지 만난 사람중엔 가장 잘 통하더라...아버지도 좋아하시고.
- 그래서?
- 흠, 몇 개월 만나보고 별 트러블 없으면 장가 갈 준비 할 것 같다.
- ...
- 왜 그래, 아까부터?
아무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자 꽤나 걱정되었는지 의자를 끌고와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어지러워? 나 없는 사이에 술 많이 마신거야? 그와중에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울컥하고만다.
- 안 가면 안돼?
- 뭐?
- 장가...안 가면 안 되는거냐고.
- 무휼?
- 너 똑똑하잖아...사람 속도 잘 읽으면서 왜 나는 몰라?
뭐라 되물을 틈도 없이 입이 막혔다. 질끈 감은 무휼의 눈에 맺혀있던 눈물은 그대로 뺨을 타고 입술을 따라 입안으로 들어와 조금 찝찔한 맛이 났다. 덜덜 떨리는 입술이 떨어지더니 테이블에 엎드려선 붉어진 눈으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 왜 나는 남자야? 왜 나는 기회도 없지? 고등학교때부터 좋아했는데...
- 야.
허리를 숙여 무휼의 코앞까지 얼굴을 가져갔다. 금방이라도 또 울 것 처럼 잔뜩 젖은 눈엔 희미하게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야, 윤무휼. 가라앉은 목소리 탓인지 움찔하며 뒤늦게 눈을 굴리며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 애썼다.
- 넌 역시 멍청하구나, 난 중학교때 깨달은걸 넌 고등학교 들어가서야 깨달았어?
- ...어?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쳐와 그대로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더 멍청해지는 표정에 다시 한 번 얼굴을 가까이해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고 그대로 혀를 밀어넣어 입천장을 꾹꾹 누르자 기겁을 하며 몸을 뒤로 빼 하마터면 책꽂이와 머리를 부딪힐뻔해 크게 웃으며 비웃었다.
- ㅇ,야...사람들이 봐...
- 먼저 뽀뽀한게 누군데?
안주와 술을 더 시켜 잔을 채우고 배를 채우고 마음도 채웠다. 붉게 드러나는 얼굴만큼이나 무휼은 솔직해졌고 방원은 뜨거워졌다. 누가 먼저 말할 것도 없이 멀리 가지도 못하고 근처 모텔에서 나뒹굴었다. 방원답지않게 충동적이고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고 무휼답지않게 겁없고 당돌한 행동이었다.
- 나 너네 아빠 무서워.
- 그래? 난 네 할머니가 더 무서워.
- 아, 나도 우리 할머니 무서워.
집 앞에 도착한지 20분이 넘어가고 있었고, 초겨울의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들어갈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살짝 잡아본 손은 밖이다 보니 두 사람 다 차가웠지만 해맑게 웃으며 단단히 붙잡아오는 무휼의 모습에 방원은 그 차가운 손끝에 입을 맞췄다.
- 하, 이렇게 금방 후련해지는거였다니...허무해, 왜 몇 년을 고민한거야?
- 그야 네가 멍청하니까.
- 야!
- 결혼하면 말하려고 그랬냐?
- ...
- 고맙다, 총각일때 말해줘서.
- 응.
손가락끝에 입을 맞추면서도 입김으로 제 손을 녹여주고 있었다. 금방 매섭게 부는 밤바람에 소용이 없는걸 절대 모를 머리가 아님에도 방원은 좀처럼 입술을 떼어내지 않았고 덕분에 굉장히 오랜만에 가슴이 간지러워 작게 몸이 떨렸다.
- 사랑한다고 해봐.
- 어?!
- 못 해?
- ㅇ,왜 나만?
- 그야 네가 먼저 고백한거니까?
재촉이라도 하는건지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어 빼내려고하자 바로 뚱한 표정을 지어 같이 입을 삐죽였다. 하면 놓아줄게. 입밖으로 나온 말은 아니였지만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새벽의 연무장은 방지만의 공간인 것처럼 그 누구도 있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게 온몸의 무게를 싫어 검을 휘두르니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적막한 연무장에서 희미하게 들린다. 동작이 크다보니 그만큼 체력소모가 컸고 늘 하던것보다 조금 부족한 시간이지만 겸사겸사 훈련을 마치고 선 채로 천천히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폈다. 아까부터 들던 찝찝한 기분에 한숨을 쉬며 연무장 바닥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 뭘 훔쳐봐?
- 그렇게 티나?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눈 앞에 나타나는 무휼의 모습에 더 크게 한숨을 쉬자 특유의 가벼우면서도 맑은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방지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인건 어떻게 알았어? 어느새 코앞까지 와서 털석 소리가 나게 연무장 바닥에 앉더니 그대로 얼굴을 들이밀길래 손가락으로 이마를 슬쩍 밀어낸다.
- 너처럼 티나는 무사도 없을거야.
- 무슨? 남들 기척을 종종 놓쳐서 그렇지 내 기척도 못 숨기는건 아니거든?
알아 듣기 힘들게 뭉개지는 어투로 투덜거리지만 가만히 무휼을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어떻게 널 몰라. 작게 중얼거린말을 들었는지 뭐라고 했느냐고 되물어 아무것도 아니라며 말을 돌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인데, 내가 어떻게 못 느낄까.
독심술은 터득하지 못한 무휼은 역시 너는 싱겁다며 따라 일어서더니 바지를 가볍게 툭툭 털어냈다. 집어넣으려던 검을 무휼 앞에 가볍게 겨누며 씨익 웃자 의중을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 대련이나 할까?
- 어? 너 허리 괜찮아?
- ...
- 아니, 야...그렇게 보지말고...야!
꽤 기습적인 공격이였음에도 금새 칼까지 뽑아 방어하고 두 칼날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묵직하게 칼 전체를 에워싸는 무휼의 힘에 손목을 가볍게 돌리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 어후, 손목이 다 저리네.
언제 기습적으로 또 공격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상관 없다는 듯 손목을 푸는 모습에 어딘가 모르게 맥이 빠지고 만다. 죽지도 다치지도 않을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무휼을 가득채우고 있었다. 많은 사람과 칼을 맞대본것은 아니였지만 처음 무휼과 칼을 부딪혔을때 저와는 다른 그 압도적인 힘에 놀랐다.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만약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게 된다면.
너는 나를 뛰어넘게 될까?
- 야, 정말로 할꺼야?
싸울 의지가 전혀 없어보이는 눈에 칼을 거두었다. 방어하느라 칼을 뽑았던 무휼도 방지의 행동에 서둘러 칼집에 넣고는 히죽 웃으며 방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 밥이나 먹으러 가자.
- 그래...
- 내가 너를 뛰어넘는 날이 올까?
함께 걷다 돌연 발걸음을 멈추며 묻는다. 독심술은 터득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절묘하게 물어보았다.
- 내가 널 뛰어넘으면...어떻게 돼?
- 그럴 일 없을 것 같은데.
- 없기는? 일단 내가 너보다 힘도 있고...내가 너보다 체력이 좋은건 밤만 봐도 알 수 있...알았으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좀 마...
- 왜 자꾸 밤 얘기를 하는거야?
- 어,어제 너가...평소보다 많이...좋아했어가지고, 자꾸 기억에 남아서...
괜히 욱한 마음에 더 매섭게 노려봐도 헤벌쭉 웃으며 방지야아,하며 말꼬리를 늘이더니 그대로 방지를 끌어안았다. 우습게도 무휼이 이렇게 안아오면 뿌리치지도 못하고 가만히 그 품에 안겨있게 된다. 이미 자신은 무휼에게 많은 것을 지고 있었다. 검술에서 마저 밀려버리면 무휼을 이길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어질 것이다. 그거까진 양보 못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