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사계의 팔자는 단순했다. 의뢰를 받는다. 수행을 한다. 성공하면 또 다른 의뢰를 받는 것이오, 실패하면 그대로 자결한다. 왜 죽여야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에게 의뢰를 받았건 그저 돈을 받으면 행동으로 옮겨야했고 그렇게 누구든 죽였다.
- 죄송합니다. 오늘은 손님이 너무 많아서요.
거의 달포는 되는 것 같다. 이번엔 이곳의 대방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무예를 익힌 사람들도 많아서 기척에 예민했고 좀처럼 틈이 생기지 않았다. 상냥하게 웃으면서도 낯선 기척엔 대부분의 기녀들이 빠르게 눈을 돌렸다. 조금이라도 살기를 드러내면 바로 경계했다.
- 으응? 뭐지, 누가 온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 뭐하니? 어서 들어오지않고.
- 네, 대방.
풍성한 치마를 안으며 걷는 그 앞엔 화려한 장신구와 옥반지를 낀 초영이 서있었다. 손님을 기다리게 해서야 되겠냐며 약하게 혼을 내곤 방으로 들어가는 그를 보고 온화하게 웃다가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가장 빈틈을 보이지 않은건 역시나 대방이었다. 조금이라도 칼을 의식해 손에 힘이 들어가면 이쪽을 바라보았고 숨까지 참으며 기척을 숨긴적이 수어번. 대방은 강하다. 사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은 대방을 이길 수 없다. 그럼에도 계속 맴돌며 기회를 넘보는건 돌아가봤자 죽음인건 마찬가지이기 때문.
- 오늘은 이만하자꾸나.
평소에도 몇 번 먼저 잠자리에 들러가곤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도 일찍 방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오늘밤 성공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기척을 최대한 죽이며 뒤를 밟았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불부터 꺼버려 환한 복도와 다르게 어둑했고 방의 문을 열자, 예상했던바와 똑같은 흐름으로 진행되었다.
대방이 먼저 벽사계의 목에 칼을 겨누었고 벽사계는 그대로 발목을 잡혔다.
- 이렇게까지 무방비하게 당할수가 있나.
- ...예상했으니까.
- 흐음.
금방이라도 죽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목소리엔 두려움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가싶더니 칼을 거두고 초에 불을 다시 붙이는 그 긴 시간까지도 저를 죽이기 위해 먼저 달려들지도 않았다. 이상하다. 침상에 앉아 가만히 올려다보는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는것 같다가도 금방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다.
- 날 죽이러 온 것이 아니었나? 네 기척은 꽤 오래전부터 느꼈는데.
- 틈이 없었으니까.
- 그래?
대방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으로 칼이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에 놀라 몸을 뒤로 뺀건 벽사계였다. 지금은 틈이 보이느냐? 여유가 느껴지는 웃음에 입술을 물며 고개를 저었다.
- 이름이 사광이지?
- 어찌?
- 정보로 밥벌이를 하는데 이정도가지고.
- ...
- 그렇게 서있지말고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 ...
- 이대로 돌아가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니, 네가 아는 지재나 어디 팔아보렴.
사람 죽이는 것 밖에 한 것이 없어 지재라고 팔 수 있는것도 없었다. 당신 이전엔 누굴 죽였고, 누굴 죽여달라고 의뢰를 받았는데 그건 누가했으며 처음으로 죽인 사람은 누구인지, 가장 힘들었던건 일, 가장 쉬웠던 일, 가장 비쌌던 일, 돈 없이 했던 일. 하나씩 말할 때마다 하루, 이틀, 달포씩 늘어났다. 사실 저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건 진작부터 알았다. 그래도, 시키지 않아도, 온갖이야기를 했다. 이따금씩 놀란듯한 표정과 측은하게 바라보며 위로해주는 그 말이 좋아져버린 것이다.
- 윤랑...어떻느냐.
- 무슨?
- 내게 오라는 말이다.
말이 안 되는 제안을 들었을 때, 방안을 밝게 만든건 손가락만한 초가 아니라 손바닥으로도 못 가리는 태양이었다.
- 어찌 그러셨습니까.
- 무엇이?
- 벽사계말입니다.
- 벽사계라니, 그런 자가 우리 화사단에 온적이 있더냐?
- 대방.
- 흐음, 그러게나 말이다...내가 왜 그랬을까?
벽사계에게 부탁해 자신을 죽여달라고 한 자가 있다는걸 들었다. 바로 찾아내 추긍하자 시덥지않은 소릴하며 변명을 늘여놔 들을 가치도 없었지만 이미 의뢰를 받은 벽사계는 무리를 빠져나왔다기에 가만히 기다려보았다. 제법 실력이 있는지 살기를 느껴 경계하면 바로 기척을 죽여왔다. 그리고 신중한지 빈틈이없을땐 시도조차 하지 않다가 마음을 비운것인지 대놓고 만든 덫에 순순히 붙잡혀 처음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벽사계들은 원래 검은 옷을 입는게 아닌가?'
'당신 화사단들도 검은 옷이던데...밤에 유리하려고 그렇게 입는거야?'
'몸을 숨기기엔 조금 더 수월하니까.'
'들키면 빨리 끝내버리면 되는거야...그래서 색은 상관없었어.'
저와의 실력차이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거면서 하는 소리가 겁이 없고 당당해 그만 크게 웃어버렸던것 같다. 괜히 칼만 만지작거리는게 참 어리다는 생각도 했던거 같다.
연무장에서 홀로 연습하는 무휼의 폼이 영 어정쩡하고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누가봐도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고 좀처럼 집중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어 조용히 지켜보던 방지는 결국 한숨을 쉬며 무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아예 목검을 내려놓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명치부근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 쓰읍...아, 왜 이러지...
- 뭐해?
- 어, 방지야.
제 아픈거에 정신이 쏠려있다보니 방지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답답한 가슴때문에 급기야 주먹을 쥐고 쿵쿵 두드려보지만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어 입이
절로 튀어나왔다. 머리위에서 왜 그러냐고 방지가 물어오는 소리에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자 맞은 편에 조용히 앉아 말해보라는듯 턱을 살짝 움직인다.
- 아니 자꾸 여기가 묵직하고 답답해서.
- 아까 점심때문에 체한거 아냐?
- 체하는게 뭐야?
- ...지금 그러고 있는거.
- 헉, 진짜? 나 그런적 한 번도 없는데...이상하네, 오늘은 왜 체했지?
- 나야 같이 없었어서 모르지...손이라도 따볼래?
- 따? 어떻게?
- 바늘이나 날카로운걸로.
날카로운거. 바늘까지 빌리러 가기엔 은근 거리가 있어 대체할 날카로운걸 찾아보지만 눈에 쉽사리 들어오지 않았다. 나무 잔가시들은 널렸지만 그런걸로 잘못찌르면 손가락이 아예 썩어들어간다고 할머니가 예전에 겁을 잔뜩 줘서 감히 해볼 생각도 안 든다. 문득 시선이 닿은건 방지의 칼이었지만 시선을 느꼈는지 칼을 조금 빼내며 이걸로 하겠냐고 물어오는 방지에겐 살기가 느껴져서 고개를 다급하게 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나 갑분이한테서 바늘 빌려올게!
그 자리에서 바로 손을 따주려는 갑분이때문에 놀라 다급하게 괜찮다고 하니 바늘이 작아서 잃어버릴 수 있으니 어디 가지말고 여기서 하고 가라며 저는 다른 일때문에 사라졌다. 다행히 뒤따라온 방지가 무휼의 손가락에 매듭을 조금 묶어주니 묶여서 피가 안 통하는 탓에 조금 붉어진 제 손가락을 보며 입을 삐죽인다.
- 이제 어떡해?
- ...무서워?
- 뭐? 하! 내가? 아닌데? 완전 아닌데?...아!
- 검진 않네.
- 아...아파...씨, 아프잖아....
갑자기 찔린 바늘에 매듭이 풀려 피가 통하자 조금 저릿한 느낌도 들어 몸을 떨자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잽싸게 돌리니 역시나 범인은 방지였다.
- 팔다리에 칼 베어봤으면서 엄살은.
- 아픈건 다 똑같거든?
오만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는게 어린아이 같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체하면 검붉은 피가 올라오곤 하는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그렇게 심하게 체한건 아니였는가싶기도 해 아니었나,하고 작게 중얼거리자 바로 일부러 찌른 거냐며 억울해 괜히 그렇다고 대답하자 어떻게 아픈거가지고 장난이냐고 침울한 표정을 짓는다. 손가락에 작게 맺힌 핏방울은 떨어질 생각도 없이 손 위에 가만히 있었다. 딱히 닦아줄만한 천도 없어 주위를 조금 두리번 거리다 혀를 내어 피를 닦아내자 놀랐는지 무휼의 손가락이 움찔하며 떨린다.
- ㅇ,야...뭐해...
- 멈춰야할거아냐.
- 아니 그냥 천으로 닦지...내 손 더러우면 어쩌려고...
- 닦을만한게 안 보이잖아, 옷은 더럽고.
워낙 작게 맺힌 핏방울은 몇 번 핥지 않아도 금방 없어져 더이상 피가 올라오지 않았다. 손가락의 붉은 기운이 얼굴로 몰렸는지 잔뜩 열이 오른 무휼의 얼굴을 방지는 모르는척하며 금방 다시 돌아온 갑분이에게 잘 썼다며 바늘을 건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