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곱절은 늘어났다. 급작스러운 부서 통합때문에 결재라인도 엉망이고 너네 일, 우리 일 따질 겨를도 없이 오죽하면 부당하다 싶으면 칼같이 거절하는 윤대리도 들어오는 일들을 전부 받아 급한것부터 빠르게 처리하고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주말 출근은 아직도 불가피하고 토요일임에도 집에 도착하니 밤 9시를 넘겼다.
- 후우...피곤해.
현관에서 구두를 벗자마자 멀리 가지도 못하고 식탁옆 의자에 늘어지듯이 앉아 넥타이를 가슴팍까지 잡아내리다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담배를 꺼내려다 먼저 잡힌 폰을 꺼내 전원을 다시 켜자 무성의한 통신사 로고가 잠깐 나타나더니 잠금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비행기티켓과 여권 커버. 두 개 다 본인의 것은 아니었다.
- 벌써 두달짼가...
팀장의 제안을 거절하자 만만한 신입에게 출장지시가 떨어졌다. 가까운 아시아권도 아니고 멀리 영국으로 가버렸다. 서로 한가한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텐데도 그래도 꼬박꼬박 먼저 연락을 해왔다.
- 곧 생일인데...늦게 챙기는거 싫어하면서.
오늘은 한 번도 연락이 오지않아 작게 중얼거리기 무섭게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저 화면만 살짝 밀면 되는건데 오늘따라 귀찮고 피곤하다. 내려놓으려는 찰나 전화는 끊기고 금방 팝업창으로 메시지가 나타났다.
[피곤해요?]
- ...맘에 안 들어, 다 안다는 듯이 문자나 보내고.
전생때보다도 귀신 같이 사람 속을 꿰뚫어보았다. 그때와는 다르게 단순한 머릿속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감도 못 잡을 지경임에도 그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지금처럼 서로 떨어져 얼굴도 볼 수 없는 이 순간까지도 그는 지금 저가 지쳐있다는걸 알았다.
답장은 커녕 그대로 옷을 벗어던지며 씻으러 들어갔다. 머리부터 닿는 물에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목욕가운만 입고 침대에 눕기 무섭게 식탁에 그대로 놓아둔 폰이 다시 울렸다. 혼자만 다른 벨소리. 누군지 알면서도 오늘따라 받기 싫었다.
- 안 받아. 오늘은 안 받을거야.
답지않게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덮으며 몸을 몇 번 뒤척이다 끊어지는 벨소리에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잠결에 머리를 작게 움직이다보니 간만에 느껴지는 포근함에 본능적으로 품에 파고들었다. 머리위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대로 일정하게 등을 토닥여주는 소리도 들려왔다.
- 우리 무휼 많이 컸네, 주군 연락도 멋대로 안 받고.
- 어떻게 왔어.
- 무슨 질문이 그래요, 내 집인데 내가 못 들어와요?
공항에서 배웅을 해준 뒤 자신의 집이 아닌 애인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뒤론 매일 이 집으로 퇴근을 했고 아마 제 집은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거나 보름에 한 번 오는 청소해주러 오는 사람이 말끔하게 치워서 새 집 같아졌을 것이다.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들자 입술이 맞닿았다. 그대로 오랜만에 치아를 훑으며 그의 몸을 더듬어보니 근육보단 뼈가 더 잘 느껴져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 해외 체질이라며.
- 음...그것도 먹을 시간이 있을때 얘기죠. 우리쪽도 엄청 바쁜데가 잡아준 숙소는 또 회사랑 멀어서.
- 다시 찌워.
- 남말할 상황은 아닌거 같은데?
등허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는가 싶더니 옆구리를 간지럽히며 장난을 쳐 감고 있던 눈을 떠 노려보지만 얼굴엔 조금의 미안함도 없었다. 하여튼 장난은. 한숨을 쉬며 일어나려 몸을 일으키는데 묵직하게 자신을 붙잡는다.
- 일어날래.
- 다시 한 번 생각해봐요.
왜? 되묻다보니 스쳐가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입에선 욕이 터져나왔다. 그런 자신을 다독이는 따뜻한 손길에 괜히 더 울컥해져 제 애인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 안아줘.
- 이미 그러고 있어요.
- 가지마.
- ...
애인은 대답이 없었고 저또한 부질없는 부탁이였다는걸 안다.
전화 벨소리에 눈을 뜨자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몸을 일으켜앉으니 딱 자신이 누워있는만큼만 따뜻한 햇살이 너무나 포근할정도로 침대를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 아, 싫다.
허탈함에 중얼거리고 비척거리며 식탁으로 향하자 전화벨소리는 끊겼다. 누구에게 걸려온건가 싶어 통화기록을 다시 살피는중에 금방 전화가 울렸다. 어젯밤과는 다르게 오늘은 고민도 없이 화면을 넘겼다.
- 왜.
[어디야? 집에 없네?]
- 응, 애인 집이야.
[어? 그 사람 한국 왔어?]
식탁에 몸을 기대며 주위를 살폈다. 텅빈 집엔 기척이라곤 없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보이는 현관에도 값비싼 제 구두만 한 켤레 놓여있다.
- ...아니, 그냥 회사랑 가까워서 여기서 잤어.
[궁상맞긴. 미역국 넣어놓고 갈테니까 먹어.]
- 정말 쓸데없이 잘 챙긴단말이야.
[야, 나도 너 남친생기면 신경 안 써도 괜찮을 줄 알았거든? 얼마나 유능하길래 신입이 이렇게 길게 해외출장이냐?]
유능한걸까. 그러고보면 다시 태어나서도 머리 하난 좋은듯했다. 수능 만점으로 인터뷰도 하고 과외로 돈 벌고 수석졸업까지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아무리 애인이라지만 제 밑에 있으면서도 힘들다고 다른 부서로 옮겨달라는 소리없이 순순히 잘 따라오는걸보면 무능한 사람은 아녔다.
- 그러게...같이 갈걸.
[아무튼 미리 생일 축하한다, 임마. 나도 오늘부터 지방 좀 다녀와야해서.]
- 검도 사범도 해먹기 힘드네...알았어.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걸음을 옮겨 침대위로 폰을 던졌다. 살짝 걸터앉기만하다 결국 다시 드러누우며 이불을 잡아 끌어 몸을 덮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얼굴을 묻은 베개엔 더이상 애인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 ...싫다.
처음 며칠은 집에 들어올때마다 그의 냄새가 났다. 쓰던 향수와 바디워시, 샴푸. 전부 그대로 있고 똑같은 걸 사용하지만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는 애인의 냄새와는 달랐다. 아니, 어쩌면 원래 무슨 냄새가 나야하는건지도 이젠 기억이 안나는건지도 모르겠다.
손을 뻗어 폰을 찾아쥐곤 갤러리를 열어 옛날 사진들을 훑었다. 신입사원끼리 한옥마을근처로 엠티를 갔던 날 다같이 한복을 빌려 입고는 사진을 찍어 보낸적이 있었다. 아주 해맑게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도련님의 모습은 그 옛날의 무휼이 보았더라면 뭘 잘못 먹었느냐며 걱정했을정도로 어울리지않게 티없이 맑았다. 몇 장 더 넘기다보니 용량이 커서 맨날 버려야지,하면서도 못 버린 동영상이 남아있었다.
[무휼, 혼자 집 잘 지키고 있어?]
- 이봐, 도련님. 여기 더이상 네 냄새가 안 나...
[하하! 어색하다. 대리님, 여기 꽤 근사해요. 다음에 같이 올까요?]
- 전화 받을걸...도련님 지금 자고 있겠지?
[점심만 먹고 해산한데요, 난 차가 없어서 터미널까지 가고 또 서울가야하니까...도착하면 해떨어지겠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갈게요, 사랑해.]
- ...빨리 와.
멍하게 몇 번을 더 반복해서 동영상을 보다보니 뜨거워진 폰을 내려놓곤 고개를 돌렸다. 언제 돌아올까, 돌아오면 무슨 말부터 해줄까. 평소 잘 안 들던 생각이 휘몰아쳐서 어색할 지경이라 괜히 피곤한 탓이라 핑계를 대며 다시 자세를 고쳐잡고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