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곱절은 늘어났다. 급작스러운 부서 통합때문에 결재라인도 엉망이고 너네 일, 우리 일 따질 겨를도 없이 오죽하면 부당하다 싶으면 칼같이 거절하는 윤대리도 들어오는 일들을 전부 받아 급한것부터 빠르게 처리하고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주말 출근은 아직도 불가피하고 토요일임에도 집에 도착하니 밤 9시를 넘겼다.
- 후우...피곤해.
현관에서 구두를 벗자마자 멀리 가지도 못하고 식탁옆 의자에 늘어지듯이 앉아 넥타이를 가슴팍까지 잡아내리다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담배를 꺼내려다 먼저 잡힌 폰을 꺼내 전원을 다시 켜자 무성의한 통신사 로고가 잠깐 나타나더니 잠금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비행기티켓과 여권 커버. 두 개 다 본인의 것은 아니었다.
- 벌써 두달짼가...
팀장의 제안을 거절하자 만만한 신입에게 출장지시가 떨어졌다. 가까운 아시아권도 아니고 멀리 영국으로 가버렸다. 서로 한가한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텐데도 그래도 꼬박꼬박 먼저 연락을 해왔다.
- 곧 생일인데...늦게 챙기는거 싫어하면서.
오늘은 한 번도 연락이 오지않아 작게 중얼거리기 무섭게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저 화면만 살짝 밀면 되는건데 오늘따라 귀찮고 피곤하다. 내려놓으려는 찰나 전화는 끊기고 금방 팝업창으로 메시지가 나타났다.
[피곤해요?]
- ...맘에 안 들어, 다 안다는 듯이 문자나 보내고.
전생때보다도 귀신 같이 사람 속을 꿰뚫어보았다. 그때와는 다르게 단순한 머릿속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감도 못 잡을 지경임에도 그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지금처럼 서로 떨어져 얼굴도 볼 수 없는 이 순간까지도 그는 지금 저가 지쳐있다는걸 알았다.
답장은 커녕 그대로 옷을 벗어던지며 씻으러 들어갔다. 머리부터 닿는 물에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목욕가운만 입고 침대에 눕기 무섭게 식탁에 그대로 놓아둔 폰이 다시 울렸다. 혼자만 다른 벨소리. 누군지 알면서도 오늘따라 받기 싫었다.
- 안 받아. 오늘은 안 받을거야.
답지않게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덮으며 몸을 몇 번 뒤척이다 끊어지는 벨소리에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잠결에 머리를 작게 움직이다보니 간만에 느껴지는 포근함에 본능적으로 품에 파고들었다. 머리위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대로 일정하게 등을 토닥여주는 소리도 들려왔다.
- 우리 무휼 많이 컸네, 주군 연락도 멋대로 안 받고.
- 어떻게 왔어.
- 무슨 질문이 그래요, 내 집인데 내가 못 들어와요?
공항에서 배웅을 해준 뒤 자신의 집이 아닌 애인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뒤론 매일 이 집으로 퇴근을 했고 아마 제 집은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거나 보름에 한 번 오는 청소해주러 오는 사람이 말끔하게 치워서 새 집 같아졌을 것이다.
눈을 감은 채 고개만 들자 입술이 맞닿았다. 그대로 오랜만에 치아를 훑으며 그의 몸을 더듬어보니 근육보단 뼈가 더 잘 느껴져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 해외 체질이라며.
- 음...그것도 먹을 시간이 있을때 얘기죠. 우리쪽도 엄청 바쁜데가 잡아준 숙소는 또 회사랑 멀어서.
- 다시 찌워.
- 남말할 상황은 아닌거 같은데?
등허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는가 싶더니 옆구리를 간지럽히며 장난을 쳐 감고 있던 눈을 떠 노려보지만 얼굴엔 조금의 미안함도 없었다. 하여튼 장난은. 한숨을 쉬며 일어나려 몸을 일으키는데 묵직하게 자신을 붙잡는다.
- 일어날래.
- 다시 한 번 생각해봐요.
왜? 되묻다보니 스쳐가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입에선 욕이 터져나왔다. 그런 자신을 다독이는 따뜻한 손길에 괜히 더 울컥해져 제 애인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 안아줘.
- 이미 그러고 있어요.
- 가지마.
- ...
애인은 대답이 없었고 저또한 부질없는 부탁이였다는걸 안다.
전화 벨소리에 눈을 뜨자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몸을 일으켜앉으니 딱 자신이 누워있는만큼만 따뜻한 햇살이 너무나 포근할정도로 침대를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 아, 싫다.
허탈함에 중얼거리고 비척거리며 식탁으로 향하자 전화벨소리는 끊겼다. 누구에게 걸려온건가 싶어 통화기록을 다시 살피는중에 금방 전화가 울렸다. 어젯밤과는 다르게 오늘은 고민도 없이 화면을 넘겼다.
- 왜.
[어디야? 집에 없네?]
- 응, 애인 집이야.
[어? 그 사람 한국 왔어?]
식탁에 몸을 기대며 주위를 살폈다. 텅빈 집엔 기척이라곤 없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보이는 현관에도 값비싼 제 구두만 한 켤레 놓여있다.
- ...아니, 그냥 회사랑 가까워서 여기서 잤어.
[궁상맞긴. 미역국 넣어놓고 갈테니까 먹어.]
- 정말 쓸데없이 잘 챙긴단말이야.
[야, 나도 너 남친생기면 신경 안 써도 괜찮을 줄 알았거든? 얼마나 유능하길래 신입이 이렇게 길게 해외출장이냐?]
유능한걸까. 그러고보면 다시 태어나서도 머리 하난 좋은듯했다. 수능 만점으로 인터뷰도 하고 과외로 돈 벌고 수석졸업까지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아무리 애인이라지만 제 밑에 있으면서도 힘들다고 다른 부서로 옮겨달라는 소리없이 순순히 잘 따라오는걸보면 무능한 사람은 아녔다.
- 그러게...같이 갈걸.
[아무튼 미리 생일 축하한다, 임마. 나도 오늘부터 지방 좀 다녀와야해서.]
- 검도 사범도 해먹기 힘드네...알았어.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걸음을 옮겨 침대위로 폰을 던졌다. 살짝 걸터앉기만하다 결국 다시 드러누우며 이불을 잡아 끌어 몸을 덮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얼굴을 묻은 베개엔 더이상 애인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 ...싫다.
처음 며칠은 집에 들어올때마다 그의 냄새가 났다. 쓰던 향수와 바디워시, 샴푸. 전부 그대로 있고 똑같은 걸 사용하지만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는 애인의 냄새와는 달랐다. 아니, 어쩌면 원래 무슨 냄새가 나야하는건지도 이젠 기억이 안나는건지도 모르겠다.
손을 뻗어 폰을 찾아쥐곤 갤러리를 열어 옛날 사진들을 훑었다. 신입사원끼리 한옥마을근처로 엠티를 갔던 날 다같이 한복을 빌려 입고는 사진을 찍어 보낸적이 있었다. 아주 해맑게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도련님의 모습은 그 옛날의 무휼이 보았더라면 뭘 잘못 먹었느냐며 걱정했을정도로 어울리지않게 티없이 맑았다. 몇 장 더 넘기다보니 용량이 커서 맨날 버려야지,하면서도 못 버린 동영상이 남아있었다.
[무휼, 혼자 집 잘 지키고 있어?]
- 이봐, 도련님. 여기 더이상 네 냄새가 안 나...
[하하! 어색하다. 대리님, 여기 꽤 근사해요. 다음에 같이 올까요?]
- 전화 받을걸...도련님 지금 자고 있겠지?
[점심만 먹고 해산한데요, 난 차가 없어서 터미널까지 가고 또 서울가야하니까...도착하면 해떨어지겠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갈게요, 사랑해.]
- ...빨리 와.
멍하게 몇 번을 더 반복해서 동영상을 보다보니 뜨거워진 폰을 내려놓곤 고개를 돌렸다. 언제 돌아올까, 돌아오면 무슨 말부터 해줄까. 평소 잘 안 들던 생각이 휘몰아쳐서 어색할 지경이라 괜히 피곤한 탓이라 핑계를 대며 다시 자세를 고쳐잡고 눈을 감는다.
몇 주전부터 시끄러웠던 학교는 아주 대놓고 사람이 넘쳐났다. 드라마자체도 파격적인 캐스팅때문에 유명했는데 그 촬영지가 자신들의 대학이라는것이 알려지자 학교에 잘 안오던 학생들도 얼굴이라도 한 번 볼 수 있지않을까하며 몰려들었고 덕분에 어딜 가더라도 사람이 그야말로 미어터졌다.
- 왜 드라마 촬영을 우리 대학에서 하는건데?
때로 몰려 이동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미간을 잔뜩 구기며 바라보다 균상이 빨대를 잘근잘근 깨물며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요한이 빨대를 그의 입에서 떨어뜨려놓으며 타이르듯 어깨를 토닥인다.
- 캠퍼스물 찍는다하면 우리 학교부터 온다잖아.
- 수업 안 가?
덥다며 뿌리치는 행동에 순순히 물러나면서도 제법 억울하단 표정을 지으며 균상과 눈을 마주하니 잠깐 눈을 마주하는가 싶다가도 입을 씰룩거리며 결국 피한다. 그의 행동에 졌다는듯 어깨를 으쓱이다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살핀다.
- 먼저 오라고한게 누군데? 안그래도 갈거다. 자취방 가있을거야?
- 그전에 도서관 가서 책 좀 빌리고.
- 집에서봐.
- 응.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대로 입술에 입을 맞춰오는 요한때문에 표정을 더욱 구겨보이지만 오히려 눈이 휘게 웃다 사라지는 모습에 기가 차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작게 웃음이 났다. 손을 흔들며 뒤로 달리는 모습에 저러다 넘어지겠다 싶어 빨리 손을 흔들어주자 정면을 보며 달려가는 요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갑자기 뒤에서 밀치는 학생들때문에 그들에게 휩쓸려 배우들이 촬영하는 현장까지 엉겁결에 도착하고 말았다.
- ...아, 짜증나.
- 선배!
배우의 비명소리와 둔탁한 충돌소리. 쓰러지는 또 다른 배우와 그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 수백개의 바늘이 갑자기 심장의 이곳저곳을 다급하게 찔러오는 느낌과 함께 눈 앞이 흐려져 고개를 제법 격하게 흔들어보지만 여전히 눈 앞에 보이는 피와 미친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에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 시발...후으, 진정해. 저건 가짜야...
- 선배! 정신차려봐, 선배!
재수없게 연기를 너무 잘하는 배우들이며 리얼리티를 살린 탓에 제법 피와 유사한 가짜 피에 급기야 코까지 시큰해지고 오한이 서리는 기분이 든다.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역시나 수업이 시작되었는지 거절해버린다. 문자라도 남겨야겠다싶어 힘겹게 폰을 두드리다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배우때문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시금 흥건한 피가 눈에 들어왔고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뒤로 몸이 기운다.
- 어! 형, 조심해요.
등을 단단히 받치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교복의 고등학생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어디 아파요?
- ...아냐, 그냥 좀...
감독은 불현듯 컷을 외치더니 다른 각도에서 촬영을 하겠다며 카메라를 돌렸다. 배우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여전히 가짜 피가 흐르는걸 내버려둔채 다음 촬영준비를 시작했다. 조금 경사진 길이라 천천히 내려오던 피는 그대로 균상의 신발끝에도 닿았다. 시발. 구역질이 날거같아 입을 틀어막는데 조금 전 자신을 받치던 고등학생놈이 갑자기 손목을 붙잡곤 사람들사이를 파고들며 자신을 끌어당겨 촬영장에서 점점 벗어나는 꼴이 되었다.
- 뭐해?
- 형 쓰러지면 저기 촬영 방해된다고 엄청 욕 먹을걸요?
그렇게 막무가내로 끌고 나오더니 그늘진 잔디광장에 앉히곤 가만히 있으라며 어딘가로 가버렸다. 진정이 제법 된 거 같아 오건말건 돌아가려 했으나 타이밍 좋게 돌아와 저에게 작은 물병을 건내왔지만 귀찮아 손을 털며 비키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럼에도 오히려 제 옆에 앉아버리는 꼬마. 뭐야, 이 새끼.
- 대학탐방온거 아냐? 너네 학교 얘들이랑 놀아.
- 음, 대학 탐방 온건 맞는데. 얘들은 없어요.
- 뭐래.
- 이미 다른 학교 갔어요.
- 근데 넌 왜 여깄어?
- 말투 봐. 재수털려서 뭔 말을 못하겠네.
- 그럼 꺼져.
와, 진짜 개싸가지. 제법 마음에 든 배우가 이 대학에서 드라마 촬영을 한다고 해 부모님이 데리러 오기로했다는 거짓말까지 해가며 다음 대학으로 떠나는 학교 단체버스에서 내려 학교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으로 따라가니 촬영을 하고 있었고 역시나 마음에 드는 연기를 하는 배우의 모습에 대학 탐방을 빠져나오길 잘했다며 뿌듯해하고 있는 와중에 작게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떨리는 손이며 가짜라며 애써 부정하는 모습에 못 볼 꼴을 본건가 싶어 촬영하는 모습을 다시봐도 별로 그래보이는건 제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몸을 휘청이는 모습에 본능적으로 그를 받쳤고 발끝에 닿은 가짜 피에 기겁을 하는 모습에 빨간색을 무서워하는건가 싶어 그를 끌고 나왔다. 이 더운날 식은땀을 흘리며 힘들어했던게 불쌍해 있어보라고 하고 물까지 사왔는데 꺼지란다. 시발, 내가 지금 뭘 포기하면서 당신이랑 있는데! 차마 입밖으로 내뱉진 못하고 일단 웃어보였다.
- 나라면 초면이라도 걱정해줘서 고맙다고하겠어요.
- 네가 좋아서 한건데 왜 내가?
- ...하아,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구요.
한숨을 쉬며 일어나길래 돌아가려는건줄 알았다. 애인이라는 형은 피봐서 죽을뻔했다고 말했는데도 반응이 없어 한숨을 쉬며 나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수업 안 듣고 글쓰고 있을거면서...놀란 가슴과 머리를 진정시키다 눈을 떴는데 코앞에 고등학생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게 그와중에 마음에 안드는지 감정이 매말랐느냐는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
- 왜 안 가고 보고있어?
- 그냥요.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라서.
- 푸흐, 어린게 보는 눈은 있네.
웃으니 보기 좋다며 따라 웃는 모습에 갑자기 심장이 다시 조여왔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자 갑작스런 스킨십에 놀랐는지 얼굴을 살짝 떼어낸다. 교복 넥타이를 잡아 당기자 중심을 잃지 않으려 자신이 기대있는 나무를 짚지만 확실히 가까워진 얼굴을 대놓고 훑었다. 대인관계따위 얽매이지 않아 사람 얼굴을 아무리 금방 잊어버리는 자신이여도 처음 보는 얼굴이고 이런 고딩은 더더욱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낯이 익고 어디서 본 것만 같아 기분이 찝찝하다못해 더럽다. 어디 아파요? 한참동안 말이 없어서 그런지 물어오는 질문에 대답 대신 입을 맞췄다. 쫄기는 커녕 먼저 혀로 입술을 핥아와 떨어지며 미간을 구긴건 이쪽이 되버렸다.
- 꼬맹이가...이름이 뭐야?
- ...아인이요.
- 모르는 이름이야.
- 알리가 없죠. 나도 형 오늘 처음 봤는데.
- 균상아!
자신을 발견하고 저렇게 멀리서부터 이름을 부르며 열심히 달려올 사람은 한 명 뿐인지라 붙잡고 있던 아인의 넥타이를 풀어주고 천천히 잔디에서 일어났다. 아인도 순순히 물러나 달려오는 그를 빤히 보다 누구냐고 물어왔고 균상은 성의없을정도로 맥없이 애인이라 대답했다.
- 와, 애인 있는데 막 뽀뽀해요?
- 섹스가 아니잖아.
오오. 기겁을 하며 떠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존경스럽다는 듯 바라봐 저도 모르게 제법 크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느새 가까이까지 온 요한은 숨을 몰아쉬며 피는 어디서 어쩌다 보았느나고 묻는다.
- 끝났으니까 신경 꺼...아직 수업시간 아냐?
- 갑자기 휴강나서...옆에 누구야?
- 은인...이라고 칠까?
엉겁결에 대면한 은인이라는 꼬마를 보고 요한은 살짝 놀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먼저 찌푸리자 아인도 덩달아 인상을 구겼고 뽀뽀한거라도 본건가 싶어 자신이 먼저한게 아니라며 해명을 하려다,
- 이방원?
기분이 확 잡치고 만다.
- 혹시 동생있어요? 분이라던가?
- ...
- 에이, 재미없네. 갈게요.
괜히 자극하고 싶어져 균상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손을 흔들자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균상과 다르게 그의 애인인 방지는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그에게 주려다 실패한 물병의 뚜껑을 제가 따며 한 모금 들이키다 하필 마주친게 이방지라는 것이 다시금 기분이 언짢아져 잔디위로 입에 머금었던 물을 그대로 뱉어버렸다.
- 저 새끼때문에 꿈꾼거였어?
간만에 꿈을 꾸었다. 제 손으로 삼봉을 끝내는 꿈. 칼을 쥔 손에 흥건히 묻은 피. 요동치는 심장. 다 끝났다는 안도감과 숨길 수 없는 묘한 쾌감. 어쩌면 정말 삼봉선생을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참나, 그의 호위무사라니...
그나마 예전에 희미하게라도 방지의 얼굴이 드러난 꿈을 꾸었으니 그가 방지일거라는 생각도 들었을것이다. 이방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아무렇지 않은척하지만 분이라는 이름에 갑자기 주먹을 쥐는 행동은 그가 전생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는걸 알려주고 있었다. 한가지 아쉬운 건 자신을 균상이라고 소개했던, 꽤나 자신의 취향인 얼굴을 한 주제에 애인이 있으면서 저와 입을 맞춘 그 패기의 형이 훨씬 낯이 익고 반가운 느낌이 들어 자신이 기억을 못 할뿐이지 그가 자신과 전생에 인연이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였다는 점이다.
- 내가 못 느낀건가...오늘은 외할머니댁에서 잘까.
아인이 자신의 전생에 대해 생각에 잠겨 뒤도 안 돌아보고 걷는 동안, 그 뒷모습을 요한은 한참이나 쫓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보았으면 피우던 담배를 다 빨고 담배꽁초를 버릴때까지도 요한은 미동이 없었다.
- 뭐야, 왜그래?
- 저 놈이 너한테 아무말 안했어?
- 말? 흠...내 얼굴이 취향이래.
못 알아본것일까. 분이까지 들먹이며 자극한 천하의 이방원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휼을 바로 옆에 두고서 그저 자극받으라며 손등에 입을 맞추는걸로 끝날리가 없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떠오른 비단옷을 입은 귀족의 사내. 환생하면서 얼굴이 변하기도하는데 그 역시도 그 얼굴이 어디 가진 않은것 같았다.
- 저 새끼랑 놀지마.
그래도 아직 그는 자신보다 온전한 기억을 갖고있지는 못한 듯 했고 이왕이면 계속, 그 상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놈, 새끼거리지마. 적어도 오늘은 형보단 훨씬 쓸모있었으니까...집에 갈래.
- 그냥 가려고? 도서관은?
- 기분 잡쳤어, 그냥 집 갈래.
- ...그래.
서로 기억을 못하면서도 이렇게 다음생에서까지 우연히 마주치다니, 참 질기고도 짜증나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수업 시간, 쉬는 시간 가리지 않고 자던 학생들도 그나마 잠을 깨고 움직이는 점심 시간. 최근에 공부를 꽤 놓아서 균상은 급식을 먹는 대신 가볍게 끼니로 먹을 수 있는걸 집에서 가져와 공부하면서 먹는걸로 대신하고 있었다. 멀쩡히 잘 보고 있던 영어 문제집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덮어지고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툭하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시비를 걸며 돌아다녀 다들 기피하는 흔히 말하는 일진들이 서있었다.
- 왜 방해야.
- 야, 졸업한 변요한선배 게이라며?
- ...뭐?
저들끼리 눈을 마주치며 키득거리는 모습에 균상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멀쩡히 학교 잘 다니고 선생님들한테 칭찬받으면서 졸업한 선배가 왜 말도 안되는 소문이 퍼져있는건지 이해 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 무슨 개소리야.
- 어떤애가 그 선배가 어떤 남자랑 키스하는걸 봤데, 존나 더러워.
- 시발, 여학생들 고백 다 차는 이유도 게이라서였냐?
- 넌 뭐 아는거 없냐? 맨날 붙어다니잖아, 야동도 막 남자들만 나오는거 보냐?
남자는 어떻게 하냐? 역겹다는 듯 헛구역질하는척 연기하며 제 앞에서 굳이 얘기하는 건 무슨 경우일까. 물론 서로 아주 어렸을때부터 옆집에서 살았고 그만큼 터울없이 지내왔다. 운좋게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같은 곳으로 배정을 받아서 2살터울이라 적어도 1년은 함께 학교를 다녀왔다. 돈 믿고 버릇없이 군다는 소리를 듣는 자신과는 다르게 항상 예의도 바르고 어른스럽다며 호평의 호평속에서만 살아왔고, 대학을 들어간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을 것이었다.
물론 솔직히 말해서 그가 소문처럼 남자를 좋아한다면 자신의 입장에선 두말할것없이 고마운 소식이었다. 곧아보이는 사람이라 감히 고백을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좋아한지도 꽤 되었고 근거없는 자신감이지만 고백하면 그가 절대 거절할리 없을것도 같았다.
그래도 이런 근거없는 무근본 소문은 듣기 역겹고 짜증만 날 뿐이었다.
- 키스하는걸 어떤 새끼가 봤는데? 증거있어?
- 몰라.
- 근데 왜 나불거려, 닥치고 꺼져.
- 그 남자가 너야?
문제집을 다시 펼치기 위해 표지를 쥐었던 손이 멈추고 만다. 제 반응이 재밌는듯 또 기분나쁘게 웃는 녀석들. 고개를 들자 몇 명은 움찔하며 피하지만 주도자는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다.
- ...뭐?
- 너냐고, 크큭...시발 하긴 그렇겠다, 그 선배 너랑만 놀았는데 너말고 더 있겠냐. 야, 그래서 네가 박혀?
- 머리속에 섹스밖에 없어? 단어나 외우지 그래? 오늘도 손바닥 찢어지겠다?
- 아니라고 안하네?
- 대꾸할 가치도 없는 소리니까.
- 야, 남자랑 키스하면 무슨 기분이냐?
기어코 제 턱을 붙잡으며 고개를 들게하는 꼴은 어디 삼류 드라마에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탁,하며 손을 뿌리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팔을 치자 교실에 조금 남아있던 학생들이 전부 쳐다본다. 귀찮고 짜증난다. 제발 더이상 신경 건드리는 소리만 하지 앟았으면 좋겠다.
- 너같이 무식하고 덜떨어진놈이랑은 키스안해.
- 와, 그래서 요한선배랑은 하냐?
- 이거 이제 보니까 게이는 지면서 퍼지기 싫으니까 졸업한 선배 팔았네.
지랄 좀 작작해! 결국 화를 못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일어나기 무섭게 자신을 붙잡는다. 유치하고 수준떨어지고 더럽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비를 붙여온 녀석은 끝까지 웃으며 균상에게 뻔뻔하게도 낯짝을 들이밀었다.
- 내가 뭐가 아쉬워서 여친도 있는데 이러겠냐, 궁금해서라니까.
- 니 새끼들이랑 키스해, 나한테 앵기지 말고.
절대로 먼저 선빵은 날리지 말라고했지만 더이상 들어주고 싶지도, 상대하고 싶지도 않아 먼저 다리를 뻗어 가슴팍을 발로 차버렸다. 맥없이 곤두박질 치는 자신들의 우두머리의 모습에 눈이 뒤집혀 그대로 균상을 덮쳤고 결국 주먹질까지 이어져 다른 학생이 교사를 불러와서야 끝이났다. 그와중에 신고 정신이 투철한 녀석덕분에 반성문을 쓰고 끝날 수도 있었지만 학부모와 경찰까지 소환되어 규모는 커지고 말았다. 수업이고 뭐고 당장 균상의 부모님을 데려오라는 녀석의 어머니는 소리를 질렀지만 비행기타고 멀리나가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금방 달려올리가 없었다.
[알아서 해결해.]
- ...그럴거에요, 필요없다는데 연락한거에요.
[내년에도 집에 들어갈까말까한거 알잖니. 최대한 혼자서 해결,]
- 알아요, 주무세요.
먼저 전화를 끊어버리곤 휴대폰을 그대로 꺼버렸다.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경제적인 부분만 지원해주고 자신을 향한 사랑도 관심도 없어진 부모다. 그래도 중학교 들어가기전까진 사랑받으며 자랐지만 두 사람이 일때문에 싸우면서 화풀이를 자신에게 해버리고 자신이 요한과 그의 가족들과 잘 지낸다는걸 알게되면서부턴 워커홀릭의 부모님은 당당하게 해외파견직도 나가고 요한의 가족에게 떠넘기듯 남기고 사라졌다.
- 너 내가 학교 졸업하자마자 이럴래?
- ...뭘.
- 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야?
결국 자신이 이렇게 화가나 멍청한 놈들과 치고박고 싸우기까지 만든 장본인을 학교에 부르고 말았다. 복도 창문턱에 걸터앉아 다리를 휘저으며 바닥을 바라보는데 요한이 손을 뻗어 찢어진 입술을 만져와 크게 움찔하며 손을 뿌리친다.
- 아아아! 아파! 꺼져!
- 꺼져? 이게 형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연고를 꺼내 손가락에 묻혀 가까이 뻗으니 조금전이 따가웠는지 피해버려 가만히 있으라며 턱을 붙잡자 입술을 잔뜩 씰룩거린다. 꽤 많이 찢어져 피딱지가 져있는 입가는 연고를 바르다 살짝 딱지가 떨어지자 바로 선붉은 피를 흘려 혀를 차며 얼른 밴드를 붙였다. 피도 못 보는 놈이 피딱지가 생길정도로 치고박고 싸웠다니. 무엇보다 절대 선빵은 날리지 말라고했음에도 먼저 선빵을 날리는 바람에 이 사단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땐 절로 정신이 아늑해졌다.
- 걔네는 피 안 났냐? 피보고 또 기절하셨겠네.
- 이제 이정도론 안 기절하거든?
- 그랬어? 많이 컸네~
- ...시발.
- 입.
- 흥.
균상은 조금이라도 붉은 색이 보이면 울었다. 남들 다 좋아하는 파워레인저도 주인공이 빨갛다고 전혀 보지 않았고 붉은 옷은 죽어도 입지 않았다. 그나마 좀 커져선 심리치료를 받아 붉은색자체엔 거부감을 안 느꼈지만 피를 한방울이라도 보면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역시나 심리치료를 받고는 있지만 요한은 그가 금방 낫지 못할 것이라는걸 어렴풋이 느꼈다.
이유를 묻는다면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균상과 무휼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요한은 요한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는 자신은 요한이 아니라 이야기해왔다. 변요한이 아니라 이방지라고, 이런 이상한 세상에 살아가던 사람이 아니라며 소리를 질렀고 그의 모습에 당연히 그의 가족들은 당황했다. 정신병원에 가도 소용이 없어 잘나가는 무당에게 데려가자 그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해왔고 믿거나말거나였지만 그의 부모님들은 그 말을 믿고 그가 과도기를 잘 넘길 수 있도록 도왔다. 사실 과도기라고 할것도 없을 정도로 조용하게 지나갔다. 다만 꿈에 따르면 균상이 무휼이 틀림없음에도 자신과는 다르게 조금의 자각도 못하고 있는 그가 걱정되었고 그와중에도 기억을 못하고 있다는걸 알면서도 그저 무휼을 다시 만났다는것에 기뻐했다.
챙겨주다보니 서로에게 큰 영역이 되어있었고 무휼의 새로운 부모님은 그런 자신을 믿고 외국으로 떠났다. 47평 아파트에서 혼자 밥먹고 잠을 자면서도 절대 먼저 놀어오거나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다. 새로 태어난 무휼은 그만큼 고집있고 사람을 싫어했다.
- 일찍 왔구나.
복도에서 대화소리가 들리자 균상의 담임이 회의실 문을 열며 나왔고 회의실안에선 당장 들어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지고보면 먼저 시비를 걸며 성질을 건드린건 자신들인 주제에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만 든다.
- 네, 선생님. 일단...사과부터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 형이 왜 사과해!
누구때문에 피가 거꾸로 돌아서 이사단이 났는지도 모르면서 사과부터 하고 본다는 그의 태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들었는지 대뜸 두사람의 사이를 가르곤 복도를 내질러 달렸다. 담임이 그를 뒤늦게 불러보지만 아랑곳하지않고 시야에서 사라져버렸고 요한은 그의 철없는 행동에 한숨만 났다.
점심 시간이 끝이나 수업중인 교실에 다짜고짜 들어가선 책가방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그대로 택시를 잡았고, 집을 향했다. 순식간에 집에 도착했고 신경실적으로 가방을 던지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 나 뭐때문에 이렇게 열받고 있는거야...사춘기니?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건내며 한숨 쉬기를 여러번하다 눈을 감았다 뜨자 처음 보는 낯선 곳이 눈에 보였다.
[뭐해? 멍하니?]
형? 익숙한 목소리가 돌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거칠게 묶은 머리에 거뭇한 수염과 한복...
[도련님한테 안가봐도 되는거냐?]
도련님? 무슨 소리냐고 다시 물어보려는 찰나 휘파람 소리가 들렸고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았음에도 몸은 멋대로 소리를 쫓아 달렸다. 아, 형. 뒤늦게 그의 존재를 깨달아 등을 돌려보지만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어 잠깐 벙쪄있는데 다시 한 번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또다시 뛰었다.
가슴은 미친듯이 뛰었고
또렷해지는 누군가의 뒷모습에 자신은 어째서인지 웃었다.
- 일어나, 밥 먹어.
- 우으...
강제로 몸을 일으켜 앉게 만들어 힘겹게 일어나보니 어느새 해가 져 방은 어두워져있었다. 자신을 깨운 그는 학교에서 본 옷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고 한적도 없는 음식냄새가 집안을 가득 맴돌았다.
갑자기 잠들어서 그런지 어지럽고 잠도 금방 깨지않아 머리를 손바닥으로 주무르다보니 무슨 꿈을 꾸었길래 옹알이까지 했느냐고 물어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 기억안나.
- 그럼 말고, 너 벌점 받아서 네가 가려는 대학 경영학과 힘들데.
- 다른 낮은데 가서 전과하면 돼.
자신이 무슨대학을 노리고 있는건지도 담임이 말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균상에게 과는 별로 중요하진 않았다. 그저 요한과 같은 대학만 들어가면 되는거였고 이왕이면 자신이 흥미로운 경영이나 회계쪽이 가고싶을 뿐이다.
- 푸흐흐.
- 뭐, 왜?
- 네가 경영학과를 노릴 정도로 공부를 잘하다니.
- 아, 존나...나 원래 공부 잘 했거든? 형보다 똑똑해.
- 그러니까. 어떻게 이렇게 머리가 좋으냐고.
- 시비걸어?
- 왜 또 그렇게 되냐? 그냥 대견해서 그렇지.
대견하다는 표현을 쓰는게 맞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여말선초의 난세당시 이 나이엔 글도 못 읽던 녀석이 지금은 성적도 제법 좋아 자신은 힘겹게 들어온 지금의 대학도 수능날 미끄러지지만 않으면 충분히 들어올 정도였다. 머리를 한참 쓰다듬어주다가 손을 거두려고 하자 두 손으로 손목을 붙잡곤 멀뚱히 올려다보는 행동에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린다.
- 좋으니까 그냥 있어.
- ...근데 너 키 많이 컸다, 조만간 나보다 크겠어.
- 클거야.
- 그래, 무휼이 겨우 이만할리가 없지.
- 뭐?
- 아냐.
- 또 그 이상한 이름 나오네, 대체 뭐하는 놈이야?
자신은 유치원을 들어갔을 때, 균상은 5살이었을때. 옆집 이웃으로 처음 만났고 그가 올 것이라는걸 요한은 알고 있었다. 바로 전날 꿈을 꾸었고, 그 꿈에서 처음으로 무휼이 나왔다. 그 옛날 그랬듯이 입꼬리를 올리고 눈이 휘도록 웃으며 내일 보자고 말하던 그의 모습과는 나이도, 키도, 덩치도, 이름도 어느거하나 겹치는게 없었지만 요한은 그를 처음 보자마자 무휼이라고 불렀고 그 실수는 조금은 고의적으로 아직까지 계속 되고 있다.
균상이 심한 과도기는 안 겪더라도, 조금의 자각은 생겨서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라는 욕심때문이었다.
- ...내 짝사랑.
- 어? 뭐?
밥이나 먹자. 머리를 두어번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먼저 나왔다. 뒷모습까지 사라지고 다시 가스렌지에 불을 켜는 소리가 들리면서 멍해있던 정신이 뒤늦게 돌아온 균상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침대에 팔자 좋게 누워선 제법 두꺼운 A4뭉텅이들을 찬찬히 읽는다. 원고를 건낸 요한은 풍선껌이 부풀어올랐다 터지고 그의 입안으로 되돌아가길 반복하는걸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기만 한다. 흐음. 전부 다 읽었는지 침대옆에 대충 내려놓곤 몸을 일으켜 앉아 요한을 빤히 응시한다. 그 시선에 못 이기는 척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위에 앉자 만족스러운듯 입꼬리를 올린다.
- 어때?
- 구려.
- 너무한다.
- 구리건 구리다고 하지 그럼, 멋있다고 그래?
냉정한 평가는 참 고맙지만 이렇게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놀리듯이 말하는건 몇 번을 봐도 속상하고 기분을 이상하게 만든다. 그래도 나름 고민하고 열심히 써서 쓴 원고들을 그에게 보여줘왔지만 단 한번도 한번에 맘에 든다고 한 적이 없었다. 당당한 그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아 늘리고 흔들자 아프다고 툴툴거리며 손을 뿌리친다.
- 어디가 이상한데?
- 나 때리지마?
- 누가 들으면 내가 너 엄청 때리는줄 알겠다.
- 아니, 처음에는 둘이 되게 멋있게 서로 돕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사랑에 빠지고 있잖아. 그게 구려.
2살 터울의 애인님은 어릴적부터 이웃사촌이었다가 그가 성인이 되자마자 대뜸 고백해오면서 사귀게 되었다. 꽤나 당돌하게 고백해 처음엔 굉장히 고민했다. 그가 날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어린 동생이였고, 초중고를 같이 나오고 대학까지 같이 다니게 된 마당이라서, 혹은 같은 사내라 고민을 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가 무휼이었기때문에.
균상에게 보여준 원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쓴 소설이었다. 고려와 조선, 이방원과 정도전, 무휼과 이방지...주요 인물들과 나라, 사병들은 전부 그럴듯한 다른 가명을 사용했다. 어릴적부터 또렷하게 꿔왔던 전생의 기억들과 그 당시의 심정을 솔직하게 일기장에 적으며 과도기를 극복해나갔고 다 큰 지금에야 우연히 그 일기장을 다시 발견해 조금 더 각색해서 소설로 써보았고 틈틈히 공모전에 투고했다. 이번 글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던 그 순간, 딱 그 순간까지를 담았다. 무휼이 그랬듯, 말없이 웃어보이는걸로 원고는 끝이난다. 전생을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면 이 글에 아무 반응이 없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오히려 구리다고만 말해왔다.
- 큰 일이 있잖아, 하다못해 그거 다 끝나고 평화로울때면 몰라.
- 사람들은 이런거 좋아하지않겠어?
- ...흐으으음, 지금 남주한테 엄청 몰입했구나?
자신의 전생도 기억 못하는주제에 감은 굉장히 좋았다. 어릴적 과도기때 자신이 잠깐 혼란스러웠던 그때도 귀신 같이 알아내선 요한이형 안 같다며 대성통곡을 하며 형을 돌려내라며 울었고, 평범한 운동신경이면서도 무사의 촉이 남아있는지 살기와 기척엔 예민하게 반응했다.
지금도 남들이 들으면 계산적이라고 할 부분일텐데 자신이 주인공을 변호하고 있다는걸 눈치채고 먼저 공격해온다. 당연히 철저히 내 생각을 풀어쓴 이야기인데 편을 안 들 수가 있겠느냐며 따지고 싶지만 그래봤자 알아줄리는 없어 그를 눕히며 괜히 몸을 쓰다듬고 허리를 쓸다 아래로 점점 손을 내리니 기겁을 하며 붙잡아온다.
- 아씨...우리집에선 나 만지지 말라니까? 다 개코들이라고.
- 만지는것도 안되는거야? 야한 냄새만 안나면 되는거 아닌가.
- 푸흐흐흐, 시발. 야한 냄새래.
키득거리며 웃는 그 입을 자신의 입술로 틀어막으며 아무말도 못하게 해버리자 표정이 뚱해진다. 예뻐서 해주는 키스가 아니라 훈계를 대신해서 하는 입맞춤이라는걸 알기 때문이다.
- 대학생이 욕 좀 하는게 어때서.
- 그래서, 결론은 이번것도 구리다?
- 뭐...두개 반? 여주 입장도 좀 서술해봐.
두개 반이라하면 딱히 수정을 안하고 공모전에 보내더라도 상금은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조금전의 키스로 몸이 살짝 달아올랐는지 뺨을 쓰다듬고 옷위로 가슴을 지분거려오지만 아직은 그가 먼저 이런 행동을 해오면 가끔 오히려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무휼이 먼저 이방지를 만져오며 유혹한다는게
- 글쎄...
너무도 상상이 가질 않았다.
- 상상이 잘 안가서 못 쓰겠더라고.
- 뭐야, 형이 작가잖아?
- 네가 말해줘봐. 여자주인공이 어떤 기분일거같아?
- 응?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 네가 잘 알거같으니까?
싱긋 웃으며 엉덩이를 주무르다 츄리닝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골사이를 지분거리자 몸을 꼬면서도 가슴을 살짝 밀어냈다.
- 아까 내 말 코로 들었어? 우리집은 안된다니까?
- 내 허리에 감은 다리나 치우고 말해.
흐흐흥, 형 사랑해. 학과내에서 그렇게 유아독존의 싸가지 아웃사이더로 소문난 주제에 자신과 있으면 해맑았다. 누구에게도 의존 안 하는것 같으면서도 자신에게는 의지했고 그만큼 잘 따랐고 그가 시키는건 툴툴거리면서도 군말없이 행했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 삶을 살아가는 이방지는 무휼에게 있어 가장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 낯설고 어색하지만 그는 지금 이방지를 사랑하고 있다.
환생썰로 벌써 2개나 쓰레기를 배출했는데 아예 이렇게 된거 방원이랑 무휼이랑 방지랑 셋이서 만나서 삼자대면하는것도 보고싶다. 방원이랑 무휼은 같은 회사니까 방지가 찾아오면 되겠지. 멀찍이서 보기에는 훈훈한 남자 셋이서 햇살밑에서 우정을 싹틔우는거 같아 보이겠지만 방원이랑 방지가 무휼이 두고 지분싸움(?)하는거ㅋㅋㅋ
너도 이도녀석이 나타나면 밀려날걸?
아, 그거 너가 나한테 밀렸다는 소리지?
너땜에 후유증 생겼을때 도와준건 나야
전애인이 너무 구질구질하지않아?
투닥투닥거리는거 무휼은 조용히 커피마시면서 속으로는 전생환생과도기 끝나서 전생 잘 억누르고 환생 개싸가지 충만하셔서
아, 그냥 둘 다 어디가서 뒤져버렸으면 좋겠다...
하면서 혀찼으면 좋겠닼ㅋㅋㅋㅋㅋㅋ
2.발렌타인데이
내가 잡은 환생컨셉으로 발렌타인데이를 상상해봤다가 나혼자 빵터졌다. 방원환생이 남녀따지는거 의미 없으니까 서로 챙겨줄까요, 대리님?이러면 우리 개싸가지 무휼환생이 내가 왜?ㅍㅍ이러면서 단칼에 거절해서 방원환생이 개시무룩할거같앜ㅋㅋㅋㅋㅋ 그래도 애가 싸가지가 없는거지 나쁜건 아니라서(뭔차이지?) 막상 발렌타인데이날 방원환생이 초콜렛주면 자기는 초코펜 사와서 입술에 바르고 뺨에 ♡모양으로 그림그리면서 자, 먹어.이랬으면 겁나 좋겠다!!!!!! 많이 먹어라 방워나
3.설날
방원환생 유신입이랑 무휼환생 윤대리 설날에 집도 못가고 당직했으면 좋겠다. 무휼은 원래 마이웨이라서 명절에 집을 안가는건 1도 아쉽지않은데 방원이는 계속 칭얼거리는데 그리고 이땐 무휼이 과도기지나서 개싸가지 환생무휼만 충만하고 둘은 연인인걸로ㅎㅎ
아, 대리님 너무하지 않아요? 명절인데 출근하는게 어딨어...
하기싫으면 하지 말라고했잖아, 짜증낼거면 집 가
대리님은 있을거잖아요
응
아, 근데 제가 어떻게 혼자가요
...이거 끝내고 떡국이나 먹으러가자
어? 진짜요? 우리 그러고 퇴근해요?
반짝반짝해가면서 물으면 아, 저 놈 또 하고싶어서(ㅋㅋㅋ)저러는거겠지...하면서도 그래, 퇴근하자. 떡국 만들어먹을까?하면서 같이 장보고 떡국만들면서 떡치고 떡국 먹고 배부르니까 소화핑계대면서 또 떡쳐<<<
4.과도기
환생판(메인트윗)으로 무휼환생이 전생기억때문에 과도기 겪을 때 달래주는 방법이 극과 극으로 해야지. 방지환생은 이미 쪄낸거에서도 나오지만 날적부터 전생알았어서 무휼이 이해못해서 개스파르타고 방원환생은 자기도 과도기 있었어서 어르고 달래고 우쭈쭈 그리고 과도기의 무휼환생은 괴로워서 울고불고 머리쥐어뜯고 괴로워죽었으면 좋겠다...헤헤 괴로워해라 무휼<<<
5.과도기2
내 환생(메인트윗)에서 환생무휼(이하 무휼)이 환생방원(이하동문)이랑 초창기에 사귀는 동안은 과도기땜에 힘들었어서 환생방지랑 한동안 섹파로 지냈으면 좋겠다 그나마 더 오래 알던 사람이고 사귀기도 했었으니까 맘이 편한거지ㅇㅅㅇ 방원이랑도 섹스하고 방지랑도 섹스하는데 방원이랑은 방원이가 하고싶어하고 막 과도기인거 이용해서 무휼 들먹여가지고 거의 혼란스러워서 도련님,대군마마 이러면서 힘들어하는 무휼이를 거의 ㄱㅏㅇ간수준으로 덮치는거고 방지랑은 그거 위로받을라고 무휼이 먼저 자기랑 하자고 하는거 방원 개자식 지한테 멋있는말로(어제 올린거) 꼬셔놓고는 하는짓은 쓰레기니까 짜증은 나는데 헤어지자고는 못하겠고 근데 정신이 너무 피폐해지니까 자기 주변엔 그나마 전생알고 이해해줄 수 있는건 방지뿐이라 위로를 받다가 워낙 오랫동안 사귀어서 헤어지긴했지만 눈만 마주치면 자기들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몸부터 반응하는거ㅇㅅㅇ 방지는 미안해 하는데 무휼은 환생하면서 마냥 착하지만은 않아서 죄책감은 잘 못느껴서 내가 하고싶어서 한거야, 궁상떨지마.이러는데 방지가 자기가 못 참고 회사를 쳐들어가서 방원이한테 주먹갈기는데 무휼은 호위무사 전생이 치고 올라와서 방원이 감싸면서 땅새야, 그만해! 도련님, 괜찮으세요?이러는데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서 도련님거리고 땅새야거리니까 두 사람 다 아, 이건 아니다.하고 회사 근처 방원이집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삼자대면을 하다가 방지랑 무휼이 섹파인걸 알고오오오 아 ㅅㅂ 배아파ㅠㅠㅠㅠㅠㅠ
긴썰
1.ㄷㅣㄹ도
환생방원이가 밤에 환생무휼이랑 떡치고 잠자는 틈에 가는 ㄷㅣㄹ도 같은거 꽂아놨음 좋겠다 아침에 뭐가 들어가있는 기분이 드니까 확 짜증은 나는데 스스로 빼려니까 수치스러워서 자는 방원이 발로 뻥뻥까는데 진동기능있는거라 방원이가 스위치누르니까 진동울려서 아, 환생설정은 메인트 아님 티스토리봐주세요ㅇㅅㅇ 뭐 여튼 진동울리니까 신음소리내면서 몸을 잔뜩 웅크리면서도 방원이 째려보면
왜그래요, 대리님?
...이거 빼
직접 빼시면 되잖아요
빨리...하,빼라고!
대리님이 빼요, 일부러 살짝 삐져나오게 했는데
무휼은 손떨면서 잡긴잡아도 절대 못 뺄거야ㅎ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ㅎㅎㅎ무휼때처럼 순딩순딩하게 자란게 아니라 마이웨이로 자존심구겨지는 일따위 안하면서 살아왔는데 너무 짜증나잖아 저 방원새끼는 왜 환생해서도 자기한테 명령질이야, 이딴거 왜 쳐넣은거야등등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방원이가 스위치 끄더니 깊숙히 쳐넣고 우리 출근해야해요, 대리님이러는데 시간보니까 진짜 여차하면 지각인거 죽어도 자기가 빼긴 싫은데 방원이도 빼줄 생각이 없으니 ㅅㅂ될대로 되라지하고 그대로 출ㅋ근ㅋ 방원이가 하루종일 괴롭히겠짘ㅋㅋㅋㅋ깜빡 졸면 스위치켜고 무휼이 PT하고 있는데 스위치켜고 근데 무휼이 회사니까 눈하나 깜짝안하고 이악물고 버티면서 방원이한테 일 겁나 많이 주고 조금만 실수해도 막 뭐라그러고 야근까지시켜버렸으면 좋겠다ㅋ 그리고 무휼은 자기집 와서 결국 자기가 빼고 빡쳐서 ㄷㅣㄹ도 던져버리고 이방원개자식 변태새끼 여말선초때부터 한결같이 사이코같은 새끼 이러면서 혼자 욕 막하고있는데 방원이 일 다 끝내고 무휼집 찾아오겠지 왜왔냐고 물어보면 가짜보단 진짜가 더 기분좋지않겠어요, 대리님^^이러고 침대가겠지
블로그에 올리기엔 너무 짧아서 그냥 여기에 올리는 환생 방원무휼...찌질한 방원이랑 욕쟁이 무휼이 보고팠<<<
퇴근하고 함께 돌아가는 길에 이도를 닮은 사람을 마주쳤다. 순간 착각할 정도로 많이 닮았지만 두사람 모두 이전에 특별한 꿈을 꾸지 못했기때문에 환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인은 덕분에 평소엔 생각치도 못했던 가정이 세워지면서 불안해지고 말았다. 전생의 무휼은 이도 그를 위해 자신에게 칼도 겨누었던 사람이다. 정말 이도의 환생이 눈 앞에 다시 나타나고 기억도 온전히 가진 채, 남자를 좋아하고, 무휼과 마주치게 되면 무휼은 무슨 반응을 보일 것이고 자신은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불안과 걱정이 쌓이고 쌓여 결국 주차장으로 걸어가려는 균상의 손목을 붙잡았다.
- 자고 가요.
답지않은 불안한 눈빛에 잠만 자고 가기에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딱하다, 이방지도 이방원도 스스로에게 너무 자신감이 없었다.
- ...알았어.
그의 집은 차따위도 필요없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그 짧은 거리를 걸어가는내내 아인은 답지 않게 조용했고 겁먹었다. 소유욕의 잘못된 표현일수도 있겠다. 자신은 착해빠진 무휼이 아니기에, 궁상떨지말라며 떨쳐버리고 집을 가버릴 수도 있었다. 비밀번호를 눌러 집을 들어와서도, 균상이 먼저 씻고 와서 목욕 가운으로 갈아 입고 침대에 걸쳐앉아 아인을 올려다보는 상황에서도 그는 불안해했다.
- ...개새끼.
- 예?
- 꿇어.
갑작스러운 명령에 아인은 다시 한 번 예?하며 되물었다. 무릎 꿇으라고. 팔짱을 낀 채 다리까지 꼬고 명령하는데 살기까지 느껴졌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툭. 툭. 무릎위 걸쳐져있는 긴 다리의 끝에 있는 발이 아인의 턱을 건드렸다.
- 대,대리님?
- 아까 그거 세종아니잖아. 너도 나도 최근 몇 달 꿈꾼적도 없어, 아냐?
- ...
- 말해.
- 맞아요.
- 근데?
- ...대리님, 이도 나타나면 이도한테 갈거에요?
턱에 닿아있는 그의 발을 살짝 떼어내 발목을 감싸쥐었다. 발등에 입을 맞추고 살내음을 맡았다. 고개를 들자 가운사이로 보이는 속옷이 아찔하다.
- 대리님 진짜진짜 사랑해요.
- 알아.
- 무휼도 좋지만 역시 윤대리님도 섹시하고 사랑스러워요...다 예뻐...다 좋아요.
- ...아인아.
- 이도 녀석 나타나면 그자식 죽여버릴거에요. 뺏기기싫어...날 버리지마요.
- 아, 진짜 지랄 좀 그만해!
균상은 신경질을 내며 발바닥으로 아인의 얼굴을 뭉개고 밀쳐버렸다. 중심을 잃은 아인은 당연히 뒤로 넘어졌고 자신이 당한 상황이 이해가 안가는지 잔뜩 얼빠진 얼굴로 균상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 방지도 그렇고 왜들 이렇게 찌질한거야. 하, 진짜 짜증나.
- 어...대,대리님?
- 이보세요, 방원도련님!
- 예! 아니, 어? 뭐?
씻고 오기나 하세요, 몇 십분째 정장이야. 균상은 투덜거리며 엉금엉금 기어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아인은 그제서야 자신이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고 뒤늦게서야 샤워를 하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누워있던 균상은 갑자기 업무가 생겼는지 안경까지 쓰고서 아인의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었다. 눈치를 보며 침대에 같이 앉는데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별말안하고 키보드만 바쁘게 두르린다.
- 화났어?
- 도련님이라고 불렀다고 반말이야? 예, 화났어요. 일 들어온거 하고 있으니까 반성 좀 하고 있을래요?
- 아니...나는.
- 이방원 도련님.
- 응?
- 대군마마.
- 응.
- 전하.
- ...응.
- 상황전하.
- ...
- 저한테 10번째로 고백하셨을때, 제가 뭐라고 하면서 거절했었어요? 그 때 하신 대답은요?
아인은 10번의 구애끝에 균상과 사귀게 되었다. 처음엔 그가 무휼의 환생이라는 확신이 없었음에도 대쉬했다. 그 첫 시도 땐 그냥 싫다고 그랬고 두번째때는 연하라서 싫다, 세번째때는 자기보다 키가 작아서 싫다, 네번째때는 자기보다 돈 못벌어서 싫다, 다섯번째때는 또 다시 그냥 싫다며 성의없는 거절만 했었다. 그러다 여섯번째 고백을 했을 땐 무휼이 균상의 전생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고백의 거절이유도 그럴듯해졌다. 여섯번째엔 자신은 지금 뒤늦게 전생이 떠올라 괴롭다며 거절을 했고, 일곱번째 고백을 했을 땐 비슷한 이유로 자신은 무휼이 아니라 윤균상이고 싶다며 거절 했고, 여덟번째 고백을 했을 땐 그저 울면서 고개를 저었고, 아홉번째 고백을 했을 땐 아인이 방원의 환생이기때문에 거절했고, 마지막 열번째 고백을 했을 땐 자신의 전 애인은 방지였다고 고백을 했다. 그와 오랫동안 사귀었고, 사랑했지만 자신이 전생을 떠올리면서 방지는 만난적도 없는 방원을 견제했고 피폐해지는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방지가 먼저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했다고 했다. 생각이상으로 그를 사랑했었기에 괴로웠고, 전생에 얽히는 연을 다시 맺으면 사랑을 하게 되도 결국은 방지와 같아질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그 마지막 거절을 듣고 아인이 한 말은 단 한마디였다.
- 겁먹지마...뭐든.
- 당신때문에 머리아프고 토할거같은데도 마지막 고백을 받아준건 그 말에 힘이 느껴져서였어요.
- ...
- 너도 겁먹지마. 전에도 말했지만 방지도 내가 찬게 아니라 차였다고.
- 그자식은 지가 뭐라고 찼데요?
- 그러니까 너도 쓸데없이 혼자 소설 쓰지말라고.
- 알았어?
- ...예.
맥이 빠지는 대답이였지만 균상은 노트북을 덮어 협탁위에 올려놓고 안경도 벗어 그 위에 올려놓았다. 제 꼼질거리는 손가락만을 바라보고 있는 아인의 턱을 들어올려 입을 맞췄다.
젊은 여성 신입사원에 풋풋한 연애중인 승연은 남자친구를 위해 주말에 있을 발렌타인데이의 초콜릿을 만들면서 회사 남성직원을 위한 작은 초콜릿들도 만들어 본인을 닮은 예쁜 포장을 해 한 명 한 명에게 전달했다. 모두들 흐뭇해하며 감사히 받았지만 특히 아인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 와~ 승연씨 솜씨가 좋네!
- 아니에요, 한거 없어요.
- 없기는!?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승연을 보다보니 기분이 참 이상해졌다. 그 당돌하고 모든 행동이 계산적이였던 부인 민다경씨가 이렇게 자신도 아닌 다른 남자를 위해 초콜릿을 만들고 심지어 배려돋게 다른 사람들 몫까지 챙기다니. 웃음이 튀어나오는걸 억지로 꾹꾹 참아냈다. 승연은 아,맞아.하면서 아까 아인에게 건내준 똑같은 포장의 초콜릿을 또 하나 내밀었다.
- 윤대리님께는 아인씨가 전달해주실래요? 전 아직...좀...
- 알아요, 알아. 저빼곤 모두가 같은 마음이죠, 뭐.
아인은 상냥하게 웃으며 초콜릿을 또 받았다. 상사도 눈치를 보는 윤대리인데 다른팀 소속 신입사원이 어찌 스스럼없이 초콜릿을 건낼 수 있을까. 설령 준다고 해도 '이런걸 왜 줘요?'하면서 시비걸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하아, 조금만 부드러워지면 좋았을것을. 아인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 자요, 대리님.
- 안 챙기기로한거 아니에요?
- ...예, 그렇죠. 안,챙,기,기,로, 했죠.
초콜릿을 주는 행동에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쳐다봐서 일부러 또박또박 안 챙기기로 했었음을 부각시키며 말했다. 동성이니 남자여자 따지는건 의미 없으니 그냥 서로 초콜릿 주고 받는게 어떻느냐고 물은게 무려 일주일전이다. 뭔가 거절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야 강하게 들었지만 정말 눈앞에서 혀까지 날름 내밀며서 싫은데?이러는데 무신경하고 너무하다는 생각까지 들어서 눈물이 핑 돌뻔했었다.
- 근데 이건 부인...이 아니라 다경, 아니, 승연씨가 주는거에요.
세상에, 얼마나 스스로의 머릿속에서 매치가 안되면 한번에 승연이라는 이름이 나오질 않는다. 멀뚱히 바라보던 균상은 아인의 손에 올려져있던 초콜릿을 받아 포장을 뜯어 바로 하나를 꺼내 먹었다. 초콜릿만 가득해보여서 먹기 싫었지만 아인이 균상에게 초콜릿을 주는 순간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승연과 여직원들의 시선을 빨리 거두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상대로 입에 넣어 몇 번 우물저리가 저들끼리 꺅꺅거리며 그제서야 시선을 돌리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성격과 어울리게 사르르 녹는 달디단 초콜릿이였다.
- 어지간히 상상이 안되셨나봐요?
- 예? 뭐가요?
- 정비마마가 이런 작고 앙증맞은 초콜릿을 만들어서 사근사근 웃으면서 돌리는거요.
- 에~이, 아니거든요?
- 그래요?
- ...조,조금?
- 푸하하하!
쾌할한 웃음소리에 모든 직원의 시선이 한 곳에 몰렸다. 바로 옆에 있던 아인은 힘겹게 허벅지를 꼬집으며 웃음을 참았고 평소엔 내본적도 없는 웃음소리를 터트린 장본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틈으로 보이는 얼굴과 귀가 상당히 붉다. 그나마 금방 정신을 차린 아인이 손짓으로 다시 눈치를 준 덕에 다들 시선을 거두었지만 아인은 균상이 작은 목소리로 시발,이라고 욕하는 것을 또렷하게 듣고 말았다.
- 큭, 대리님...크큭, 무휼인줄 알았어요.
- ...나도 아니까 제발 닥쳐요.
꽤나 붉은 기운은 가라앉았음에도 여전히 얼굴을 손바닥안에 숨긴채 웅얼거리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일단은 두 사람이 연인관계라는걸 아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에 겨우 참고 시선을 돌리다보니 유난히 빼빼로가 유난히 많이 보였다.
- 빼빼로 받으신거에요? 발렌타인데이인데?
- 초콜릿만 있는건 싫다고했더니 빼빼로로 주던데요.
눈에 보인김에 먹으려는지 은근히 쌓여있는 빼빼로중에 하나의 포장을 뜯어 오독오독 씹어먹었다. 그러고보면 은근 일하면서 자질구레한 군것질거리가 항상 책상에 놓여있고 즐겨먹는게 본인은 무휼과 전혀 다르다곤 했지만 확실히 전생임을 무시 할 수 없는 습관들이 있었다. 조금전의 웃음소리라던가.
- 그래요?
재주 좋게 손도 쓰기 않고 빼빼로를 서슴없이 먹는 균상의 코 앞으로 다가갔다. 시선에 고개를 돌린 균상을 묵묵히 바라보다 얼굴을 가까이해 입에 삐쭉 튀어나와있는 빼빼로를 한 입 베어물었다.
- 저도 참고하면 되는거죠?
보는 사람이 많은데 겁없이 한 행동임에도 얼굴 하나 안 변하고 남은 빼빼로를 씹어삼켰다. 오히려 보란듯이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그에게 물었다.
- 담배피러가고싶어요?
두 사람은 회사내에서도 유명한 꼴초였다.
- 네, 많이요.
하지만 순전히 담배를 피우기 위한 제안은 아니었다.
- 하...키스만 하라고...읏!
- 혈기왕성한 이십대한테 너무한거 아니에요?
재떨이위에 담배를 천천히 태우면서 시간을 때우고 저돌적으로 키스와 애무를 퍼부었다. 직원들이 워낙 고집이 강한 균상을 기피하다보니 흡연실이 두 곳이고 한 곳이 거의 균상의 개인 휴식공간이었는데 아인이 들어오고, 둘이 교제를 하기 시작하면서 그 곳은 가벼운 성욕을 푸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섹스까진 안하는데 오늘따라 아인이 급하다.
- 진짜 안되나요, 대리님? 응?
- 안돼.
- 금방 끝낼게요, 대리님~
- 너만 생각해? 나는?
- 에~이, 제가 세게 나가면 대리님은 저보다 훨씬 먼저,악!
정강이를 걷어차자 차인 곳을 바쁘게 손으로 비비며 야! 무휼!이라고 소리쳤지만 노려보는 시선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사무실로 돌아가려던 균상은 갑자기 아인의 손을 잡더니 손 위로 적은 갯수로 포장 된 곰젤리봉투를 5개 쥐어주었다.
- 어? 대리님?
- 다 먹으면 다른거 또 줄게.
- 다른거요?
- 뭐든 네 예상은 벗어나는 무언가일거야.
작고 은근 질긴 곰젤리는 일을 하면서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5봉지를 전부 먹고 손을 내밀자 건내준건 막대사탕 5개였다. 씹어서 먹지말라고 해서 천천히 핥아 먹다보니 2개밖에 못 먹었는데 퇴근시간이 왔다. 주말은 서로의 집을 번갈아가며 함께했는데 오늘은 균상의 집에 가는 날이었다.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낮에 쌓였던것을 풀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고 그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급하게 밀어넣어 문을 닫고는 대뜸 입부터 맞추었다.
- 읍...뭐...하,는...
- 아까 낮부터 너무 하고싶어서.
- 안 비켜?
- 응.
언제든 그와의 섹스는 유쾌했다. 무휼과는 전혀 다른 반응과 행동을 비교해본다거나 예전과 미묘하게 바뀐 성감대를 새로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무슨 옷을 입고 있어도 색기가 넘치고 유혹적이지만 깔끔한 정장을 구기며 밀어붙이듯이 몰아세울때가 가장 기분이 짜릿하다. 강제로 몸을 돌려 상체를 붙이곤 벨트와 지퍼를 풀어내 손을 집어넣었다.
- 아! 야,읏...
- 왜 이렇게 대들어요, 무휼땐 안 이랬잖아.
- 그땐...읏,멍청해서...힘이 있었어도 대들지 않았었어.
- ...맞아요, 그래서 대리님이 좋아.
과도기를 지난 지금 무휼의 기억은 더이상 균상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저 어느순간 강하게 박힌 소설이나 만화 속 주인공의 일대기처럼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있는 별개의 존재같았다. 때문에 균상도 아인도 서로의 과거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아인은 낮에는 순하고 남을 생각하는 무휼이 균상보다 좋다는 생각을 종종하지만 섹스할때만큼은 무휼보단 균상이 더 좋았다.
- 그 땐 손만 잡아줘도 좋아서 얼굴붉혔던 무휼이...이렇게 똑똑하고 잘나게, 자존심도 강한 연상의 윤대리가 되서,
손길은 더욱 끈적해졌고 균상의 숨소리도 더욱 뜨거워졌다. 바지와 속옷만 살짝 벗겨내 뒤를 파고들자 허리가 한껏 휘어 가슴과 뺨이 벽에 쓸렸다.
- 하기 싫은데 어리고 짐승같은 후배한테 힘에 밀려서 이렇게 벽에 가슴을 바짝 붙이고 뒤를 대주고 있다는게 너무 좋다구요.
- 흣!
- 그리고 머리를 안 따라주는 본능에 자존심 상해서 눈물 흘리는거...진짜 치명적이에요. 모르시죠? 방지는 착해빠져서 이런짓 안 했을거야. 대리님이 하고싶어하실때만 했겠지.
몸이 자꾸만 벽에 부딪히고 벗지 못한 정장때문에 갑갑하고 흥분감에 달아올라 땀이 흘러내렸다. 재킷만이라도 벗고싶었지만 아인이 저지했고 아인의 허리짓에 의해 흔들리고 떨리는 손으로 겨우겨우 단추를 풀러 가슴은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했다. 차라리 전부 벗어버리거나 지금 가버렸으면 좋겠는데 아인은 그럴기미가 없어보였다.
- 그만...아,그만해!
- 정말요?
반쯤 포기하고 말한것인데 의외로 아인은 순순히 그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을 돌려 주저앉았다.
- 하아...하...
- 이대로 그만해요? 여긴 이렇게 난리인데?
구두채로 잔뜩 발기해있는 균상의 것을 툭툭치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자신도 똑같은 상황이면서 뻔뻔하게 그지없었다.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바라보자 아인은 균상의 신을 벗겼고 자신의 신도 벗어 집안으로 들어왔다. 현관문을 들어선지 15분만에 거실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 혼자하는건 자존심 상하잖아, 나이가 몇인데...아냐?
다시 손으로 슬금슬금 자극하며 아인이 물었다.
- 짜증나는 왕같으니.
- 어명은 받들라고 있는거지.
퇴근하기 직전까지 먹은 사탕탓인지 키스는 쓸데없이 달콤했다. 현관에서부터 그렇게 몰아세우더니 막상 침대위에선 다정하게 안아주었고 기분이 조금은 풀려서 허리도 돌려주고 쇄골뼈에 진하게 키스마크도 남겨줬다. 그렇게 한바탕 신나게 뒹굴고 저녁을 먹는데 아인은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 맞다! 나 준다는건 이 사탕이 끝이에요?
- ...다 안 먹었잖아.
- 엥? 더 있다는거에요?
- 흠...근데 아까 먹는 속도보니까 다 먹으면 오늘이 끝나갈거 같긴한데...
6시 30분에 퇴근해 집에 도착했을땐 7시가 넘었었고 뒹굴고 씻다보니 벌써 시간은 9시를 향하고 있었다. 시계를 빤히 쳐다보던 균상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밥을 입에 넣었고 아인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 뭔데 그래요?
- 다 먹고 설거지해주면 줄게.
- 어? 그거면 되요?
- ...될거야, 아마.
몇 개 안되는 그릇들은 금방 씻을 수 있었다. 5분도 안 걸리는 짧은 설거지를 마친 뒤 아인은 싱크대에 몸을 기대며 침대에 엎드려 TV채널을 돌리는 균상을 빤히 쳐다보았다.
- 설거지 다 했는데요.
- ...냉동고 열어봐.
- 냉동고요?
- 응.
- 하하하하! 이거 뭐에요? 귀엽다~
냉동고를 열자 눈에 보인건 작은 상자였고 상자안에 든건 반지모양의 초콜릿 8개였다. 크기가 제각각인걸 보면 손가락별로 끼우는 것 같은데 직접 만든건지 어디서 산건지는 알 수 없으나 4개의 다크 초콜릿반지와 4개의 화이트 초콜릿반지는 커플링 같은게 귀여웠다.
- 발렌타인데이는 주말인데, 일찍 줄 필요는 없잖아요?
- 싫어?
- 싫기는요, 완전 좋은데?
- 가져와.
손짓하는 균상에게 냉큼 달려가 침대에 앉자 화이트로 끼워달라며 왼손을 쓱 내밀었다. 그 행동이 너무도 귀여워 손에 한번 입을 맞춘뒤 크기를 비교하며 하나하나 손가락에 끼워줬고 균상도 아인에게 똑같이 다크초콜릿을 왼손에 하나씩 끼워줬다. 초콜릿반지들은 하나같이 딱딱 사이즈가 꼭 맞았다.
- 치수는 언제 알아낸거에요?
- 그쪽 주무실때요.
- 푸흣.
- 뭐해, 먹어야지.
- ...아깝다. 은근 예쁜데 이거.
- 아까우니까 천천히 먹어.
균상이 먼저 시범으로 아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빨아먹어보였고 아인도 따라서 균상의 손가락의 초콜릿을 빨았다. 검지, 중지, 약지까지 천천히 다 먹은 뒤의 마지막 새끼손가락의 초콜릿은 조금전까지의 반지들과는 달리 단맛이 전혀 느껴지지않았고 단단했다.
- 어?
- 흐흥.
당황하는 아인을 보며 균상은 재밌어했다.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그를 보며 균상은 반지를 살살 긁어내 겉포장지를 벗겨냈다.
- ...헐.
- 짠.
반지는 초콜릿색의 포장지를 벗겨내자 밝은 은색을 띄고 있었다. 급하게 벗겨낸 균상의 화이트초콜릿반지 또한 자신과 똑같은 색과 모양의 반지로 탈바꿈했다.
- 프러포즈 반지는 전하가 하셔요.
- ...와.
- 무휼은 생각도 못했을테지?
- 대리님, 사랑해요.
- 푸핫!
- 진짜, 정말로요.
- ...알아.
따뜻한 웃음이었다. 그저 아무말 없이 살짝 눈을 휘며 입꼬리를 올리는 부드러운 웃음. 첫눈에 반한것처럼 가슴이 다시 바쁘게 뛰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 이런 로맨틱한 상황을 만들어준 달콤한 초콜릿맛이 나는 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