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아 돌아오거라
뒷북의 성년의 날
성년의 날. 어엿한 어른이 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장미꽃을 선물하고, 향수를 선물하고 연인끼리는 키스를 선물한다는 예쁜 날.
다가온 성년의 날을 맞아, 방원은 온갖 백화점과 화장품가게를 전부 들렀다. 이미 양손엔 크고 작은 종이가방으로인해 더이상 쥐고 갈 곳도, 팔에 걸 곳도 업어보였지만 그는 끊임없이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녔다. 혼잣말로 마지막이라며 들른 백화점에서도 그의 표정은 썩 좋지 않다.
- 뭐 찾으세요?
- ...향수요.
- 아, 그럼 이건 어떠세요? 은은하고 오래가서 여성분들이 많이 찾는데?
- 여자 줄 거 아닌데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여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방원덕에 여직원은 한껏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동료직원과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내 남직원과 바통터치를 하고 말았다.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같은 남성끼리 뭔가 통하겠지,하고 내린 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원의 표정은 초지일관으로 무뚝뚝했고 테스트지에 이 향기, 저 향기 전부 뿌려보고 맡아보지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초지일관으로 신경쓰지 말라고하지 직원들은 답답할 노릇이였고 결국 몇 개 골라낸 것들은 이미 구입한 것 들이라 마지막 백화점에선 빈 손으로 나오고 말았다.
- 내꺼 고르는거보다 훨씬 어렵네...
양손에 가득 들린 향수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집으로 걸어다가보니, 아직 룸메이트인 무휼은 도착전인지 멀찍이 보이는 집의 창문은 아직 어둡다. 힘겹게 도어락을 누르고 집의 불을 켜니 두 사람 다 늦잠자서 뛰쳐나간탓에 정신없는 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아, 습관처럼 나오는 한숨을 쉬며 종이가방들을 내려놓고 밤이 늦었지만 창문부터 열었다. 늦게 오겠지. 저와는 다르게 사교성이 뛰어난 애인이다. 오늘도 동아리 회식이라고 했으니 잔뜩 술에 취해서 올 것이 뻔해 또 다시 한숨이 나오지만 일단 집을 청소하는게 우선이었다.
- 힉!? 이게 다 뭐야?
- ...뭐야, 벌써 왔어?
현관문을 열어놓은 상태로 청소를 하다보니 무휼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방원은 뒤늦게 그를 반겼다. 신발을 벗자마자 종이가방들을 긴 다리로 훌쩍 뛰어넘고는 다리가 아까울 정도로 작은 보폭으로 쪼르르 걸어와선 방원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통을 부볐다. 회식 취소되서 바로 집왔엉.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콧소리를 내며 달라붙는 바람에 결국 청소는 관두고 침대에 앉아 그를 쓰다듬었다. 잠깐 가만히 있는가 싶더니 방원의 허벅지에 누워선 개나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려서는 쓰다듬어 달라는듯 방원의 손을 끌어다 제 머리위에 얹는다. 이젠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귓볼을 만져주고 목을 쓰다듬어주다 어깨를 토닥여준다. 한참이나 가만히 그 손길을 다 받더니 고개를 들어 다시 종이가방을 바라본다.
- 저거 다 뭐야?
- 너꺼.
- 나?! 또 뭘 저렇게 산거야.
- 잘됐다, 다 들고 와줄래?
- 형 또 쓸데없는데다 돈 쓴거지? 그러는거 아니야~ 결국은 다 형 부모님 돈...
- 말이 많네?
- 헉...아냐, 다 들고 오면 되는거지? 하하하!
그렇게 크게 싸운적이 없음에도 무휼은 방원이 눈썹을 조금만 꿈틀거려도 잔뜩 겁먹어선 뭐든 순순히 했다. 급하게 몸을 일으켜 침대를 빠져나와선 종이가방들을 한아름 안고와선 침대위에 흩뿌리듯 펼쳐놓았다. 가방에서 하나하나 상자를 꺼내는 방원을 따라하다보니 이름이 익숙한 것도 있고 생전 처음 듣는 브랜드도 있었다. 한 주먹도 안되는 작은 병부터 음료수 캔보다도 훨씬 큰 병까지, 몇 개는 방원이가 쓰는 것과 같은 브랜드여서 이 모든 것들이 향수라는걸 알아차리는것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 왜 이렇게 많이 샀어?
- 너 몰래 사려니까 뭐가 어울릴지 모르겠잖아.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이거 환불돼?
- 개봉하면 안 될걸? 손목 줘봐.
향수 비싸지않아? 형 뭐든 백화점에서만 사잖아. 손목을 내밀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손목을 건내면서도 침대위에 가득 널부러진 향수들에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아무리 집이 잘 살고 본인도 과외를 하면서 돈을 많이 벌고 있다지만 이렇게 씀씀이가 큰 모습은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잠깐 생각에 잠긴사이에 손목이 차가워지더니 방원이 평소 뿌리는 향수와 비슷한 향기가 약하게 퍼졌다. 손목을 코에 가까이해 냄새를 맡았다 향기가 너무 진해 두통이 밀려와 고개를 젓자 방원의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웃지마. 툴툴거리자 달래듯 입을 맞춰왔다.
- 이거 형이 뿌리는거랑 비슷한거같아.
- 응, 근데 너랑은 안 어울리는거 같다. 반대쪽 손 줘봐.
- ...다 뿌릴거야?
- 당연한거 아냐? 이참에 정해두면 계속 그거만 사면 되니까 괜찮아.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반박할 말은 더이상 떠오르지 않아 순순히 반대쪽 손목을 건냈다. 오늘 교양시간에 방원의 옆에서 치근덕거리던 여동기에게서 나는 냄새와 비슷해 표정이 안 좋아진다. 이거 싫어.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던 방원은 너무 단호하게 싫다고 하는 무휼때문에 아쉬워하면서도 다른 향수를 또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디에 뿌릴 것이냐는 질문에 대답 대신 바지를 걷으며 발목에 뿌렸지만 발목을 그의 코앞으로 내밀어주는건 꼴이 우스워보여 관두고 방원 혼자 향기를 맡았다. 무휼의 체취와 섞이니 묘하게 향기가 변해 안 어울렸다.
- 너 다 벗어봐.
- ...어!?
- 아직 한참 남았잖아.
- 아,아직 뿌릴 곳은 있잖아? 귀,귀랑...목이랑...
- 이미 볼꺼 다 봤으면서 내외하긴...알았어. 가까이 와봐, 그럼.
얼굴을 그에게 가까이 들이밀자 턱을 붙잡고는 귀 뒤에 향수를 또 다시 뿌리곤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조금 말리더니 코를 가까이하며 냄새를 맡았다. 이번엔 꽤 마음에 들었는지 흐뭇하게 웃고는 지금까지의 향수들과는 다른 위치에 내려놓고는 또 다른 향수를 반대쪽 귀 뒤에 뿌렸다. 양쪽에서 미묘하게 다른 향수 냄새가 섞여 오히려 이도저도 아닌 냄새에 절로 코를 찡긋거리고 만다. 그러거나 말거나, 방원은 제법 진지하게 목과 쇄골에도 향수를 뿌리기 시작했고 향을 맡기 위해서라는건 알지만 바짝 다가오는 얼굴과 제 몸의 냄새를 맡는 행동에 무휼은 저도 모르게 온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 ...형, 나...그...저기...
- 응?
- 이,있잖아...아직 한참 남았...어?
- ...응, 한참 남았는데?
- 그, 그만하면 안 될까? 나 머리 아픈데...내가 좀 개코잖아...히,힘든데...
- ...
- 아, 아니면 나 뿌린 부분만 씻고 오면 안될까?
- 그럼 비누냄새가 섞이잖아.
차마 자신이 지금 꼴리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어서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 방원이 갑자기 쇄골에 코를 묻으며 비벼와 한껏 당황하며 그를 뿌리치려고하자 오히려 팔을 붙잡고는 놓아주질않고 그대로 쇄골을 핥아와 작게 소름이 돋는다.
- 아...형.
- 이 근처에 뿌린거 향기 좋은거 같아.
- ...거짓말...으아!
아예 무휼을 눕히곤 대놓고 얼굴을 목과 쇄골에 묻으며 체취를 맡았다. 코가 닿는 목주변은 물론이고 가슴까지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무휼과는 다르게 방원은 모든 행동에 여유가 넘쳤다. 천천히 혀로 핥아오는 그때문에 결국 먼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매달리는건 무휼이었고 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옆구리를 쓰는 손길에 무휼은 울상이 되버리고 만다.
- 맨날 내가...
- 그래서 싫어?
옷을 들춰 가슴을 깨물며 묻자 들려오는건 대답 대신 가픈 숨소리였다. 며칠전에 남긴 자국들이 아직도 남아있는것에 입꼬리를 올리며 그 위로 새로운 키스마크를 남기자 무휼이 기겁하며 몸을 일으키려하지만 금방 방원의 키스때문에 다시 드러눕고 말았다. 그의 외침은 웅얼거려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퍽퍽소리가 나도록 매몰차게 때려서야 두사람의 입술은 떨어졌다.
- 아프잖아.
- 또 자국 남기면 어떡해...나 오늘도 둘러대느라 힘들었는데...
- 그냥 말하라니까?
- 아, 어떻게 그래!
- 난 정말 괜찮은데...
- 싫어, 형 욕 먹고 다니는거 내가 싫단 말이야.
급기야 울먹거리는 바람에 알았다며 그를 어르고 달래며 품에 안았다. 방원에게 안길때면 무휼은 항상 그의 목에 코를 묻었다. 땀냄새와 특유의 체취와 향수 냄새가 모두 섞이면 역할것같았는데 오히려 방원에게서 나는 냄새는 좋았다. 어떨 땐 일부러 향수부터 뿌리고 오라고 부탁할 정도로 그가 즐겨쓰는 이름 외우기 힘든 향수와 체취는 묘하게 잘 어울렸다. 오늘은 무휼 자신에게 뿌려진 다양한 냄새의 향수때문에 그의 향기가 미약했지만 그 미약한 향기라도 붙잡고 싶어 코를 깊이 묻고, 혀로 핥았다. 오늘 온갖 다양한 향수를 사다 준 방원에겐 미안하지만 그와 함께 있을 땐 선물 받은 향수를 쓰진 못할 것 같다.
자신의 향수냄새때문에 방원의 냄새를 못 맡는게 그에겐 너무나도 싫을 것 같기 때문에.
어린 호위무사
문 밖으로 다 큰 사내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어느 누구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못하고 혀만 차며 그 옆을 지나갔다. 저렇게 마음 약한 놈은 왜 계속 붙잡고 있는거야, 실력만 좋으면 다인가, 대놓고 큰소리로 들으라는 듯 질책하며 지나가는 사람들때문에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괜찮아, 괜찮아. 희미하게 달래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좀처럼 울음 소리는 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문 밖에 서있던 영규는 먼저 방 문을 두드리며 기척을 냈다.
[...왜?]
- 대군마마, 그녀석 그냥 혼자 두는게...
[싫어요! 나랑 있을거에요!]
[응. 어디 안 가. 여기 있을거야]
- 대군마마!
결국 주먹에 감정을 실어 문을 강하게 두 번 두드리자 울음소리는 멈추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괜히 마른침을 삼키며 영규를 바라보았고 얼마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더니 살짝 굳은 표정의 방원이 나오며 문을 조용히 닫는다. 방원의 뒤편으론 희미하게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고 문을 흘끗 바라보고는 다시 영규와 눈을 마주하며 문에 살짝 몸을 기댄다. 형. 예, 대군마마. 답지않게 영규도 제법 단호한 표정으로 방원을 바라보았다.
- 오늘따라 왜 그래?
- 오늘은 특히 대군마마가 위험하셨으니까요.
- ...푸흐, 형은 있지도 못했잔아.
- 정안군마마!
- 소리 낮춰, 또 울리려고 그래?
- ...
- 내일 얘기해, 어쨌든 이번에도 날 살린건 저녀석이야.
더 뭐라 따지기엔 방원의 태도가 너무도 단호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주위를 기웃거리던 사람들까지 전부 내쫓으며 사라져갔다. 하아...한숨을 쉬며 이마를 손바닥으로 누르는데 문너머로 자신을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군마마, 대군마마! 그제야 방원은 다시 문을 급하게 열며 방안으로 들어섰고 모습이 보이자마자 자신을 끌어안으며 다시 울기 시작하는 그때문에 또 작게 한숨이 나온다. 툭,툭. 작게 그의 등을 토닥이자 더 강하게 껴안으며 연신 자신을 부른다.
- 대군마마...마마...흑...
- 응, 나 여깄어. 무휼. 괜찮아, 잘했어.
- 마마...도련님에서 마마되면서 너무 위험해졌어요...무서워요.
- 앉아, 일단 안자. 응?
침상에 앉아서도 훌쩍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무휼의 얼굴을 다정히 쓰다듬으며 눈물을 닦아주자 연신 무섭다, 죽으면 안된다, 가지 말아라, 자신이 하고 싶고 듣고 싶은 말만 쉴틈없이 내뱉었고 방원은 조금전과는 다르게 일절 엄한 표정도 짓지 않으며 오히려 상냥한 미소를 짓고는 괜찮다, 죽지 않는다, 어디 안간다, 그가 원하고 듣고 싶어하는 대답들을 쉴틈없이 말하며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간지러운 입맞춤과 상냥한 그의 목소리와 행동에 겨우 진정이 되었는지 히죽 웃으며 허리를 껴안고 가슴에 얼굴을 부비는 무휼을 내려다보며 방원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저잣거리에서 씨름판이 벌어지는걸 구경하는데 제 또래같은데 더 큰 성인도 쉽게 넘기며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가별초로 보냈고 무휼을 이길 수 있는 병사는 가별초내에는 이제 없고 제 옆에 있고싶어한다기에 호위무사로 삼은 이후엔 시도때도없이 함께 있었다. 하루는 왜 자신과 있고싶으냐 물었더니 고백들은 여인마냥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좋다고 말해와 처음엔 그저 우정인줄로 알았지만 이따금씩 입을 맞춰오는 것이며 껴안고는 놓아주지않는 것이 그 이상의 감정이라는걸 깨달은지는 꽤 오래된 이야기이다.
머리는 좀 모자랐지만 실력은 전혀 모자르지 않았다. 배우면 금방 익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타고난 힘도 강했다. 싸울 땐 아군적군을 가리지 않고 처참히 무너뜨리지만 싸움이 끝이 나면 크게 앓았다. 그나마도 다른 사람들은 다가오지도 못하게 하고 방원의 옆에만 붙어있었다. 방원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고 그로인해 피를 보았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이고 조선이 세워진 뒤, 그를 죽인게 방원이는것이 사실화되면서 그의 제자들은 잊을법하면 그를 죽이기 위해 암살단을 보냈다. 오늘은 특히나 갑자기, 그리고 많이 덤벼들었고 오죽하면 방원 스스로도 활을 쥐고 싸울정도였다.
- 아까 다친곳은 괜찮아?
- ...네, 괜찮아요. 대군마마는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 멀쩡해. 덕분이야.
- 오늘은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대군마마한테 달려들었어요...그래서...피도,엄청,어,어,어,엄청...보고...
다시 몸을 덜덜 떨며 엄지손가락을 빨기 시작하는 무휼에 제법 단호하게 손가락을 빼며 그의 이름을 부르자 놀란 강아지처럼 몸을 떨더니 곧 갓난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결국 신을 벗겨 눕히곤 자신도 신을 벗어 함께 누운 뒤, 그를 품에 안으며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딸꾹질까지하며 서럽게 울던 무휼은 한시진가까이 방원이 토닥여주자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저때문에 다친 뺨을 살짝 문지르자 움찔거리면서도 허리를 껴안으며 다시금 깊은 잠에 빠지는 그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린다.